[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이미지
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생각 ] 지금 시점에서 외국어 공부를 할 필요성이 있는가에 대해


오늘은 최근에 들기 시작한 생각이다.
지금 시점에서 과연 외국어 공부를 할 필요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이다.

최근에 알파고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일반 사람들에게는 AI가 세상을 정복하는게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가
뉴스에서 많이 떠돌았다.

뭐 실제로는 다르지만 말이다.

어쨋든 일반 사람들에게 까지 AI가 가능성이 있겠다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시장 개척의 가능성도 함께 드러났다.

그 이후 많은 기업들이 AI쪽으로 눈을 돌렸고, 실제로 이미 AI쪽에 올인을 건 기업도 많다.

그 만큼 미래의 산업은 AI가 중심이 될 것이라 기업들은 판단한 것 이다.

그리고 지금에서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AI기술이 쓰이고 있는 곳은 마케팅과 이미지 인식 쪽인 컴퓨터 비전 쪽 그리고 번역 기술인것 같다.

사실상 머신러닝은 지금 연구가 엄청 진행되고 있는 단계이기도 하고, 연구할 인원도 부족하며, 현실과 연결 시켜줄 엔지니어들도 사실 없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 머신러닝이 현실에 적용 될 정도의 기술로 발달 한다면, 아마 세상의 패러다임이 다시 한번 바뀔 것이다.

9년전 아이폰이 등장 한 것 처럼 말이다.

아이폰이 등장해 스마트 폰이라는 새로운 시장의 개척과 스마트폰에 관련된 다양한 시장이 개척되고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아마 머신러닝 기술도 이와 같이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고 관련된 다양한 시장이 개척될 것 이다.

이 것이 우리의 가까운 미래이다.
내 생각에는 얼마 멀지 않은 것 같다.

어쨋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외국어 공부를 할 필요성에 대해서이다.

이 머신러닝이 도입되면서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룬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번역이라 생각 한다.

내가 3년전쯤에 IOT에서 음성인식을 이용한 홈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개인프로젝트를 했을 때 구글의 TTS를 사용했었는데, 인식률이 썩 좋진 않았다.

그 때 하면서 아마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번역 텍스트쪽도 확인을 했었는데,
마찬가지로 번역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였다.

어느 정도 이해 할 수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할 수 는 없었다.
그래서 실제 영문을 봐 가면서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최근에 코세라 강의를 이용하면서 구글 번역기를 다시 사용하게 됐는데,
놀랍게도 번역률이 뛰어났다.

대부분 본문을 보지 않아도, 단순에 문맥이 이해 될 정도 까지 발전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의역이 필요하지만, 이 정도면 사실상 뛰어나지 않나 싶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엄청 많이 걸리는 정도 까지는 아니다.
이 정도면 코세라의 대부분의 강의는 이런 방식으로 들어도 상관없을 정도 이다.

TTS는 트위치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치 진짜 사람이 말한 것 처럼 말 할 수도 있다.
이 정도 번역이 가능하다면 사실상 멀지 않은 미래에 번역가는 필요 없지도 모른다.

물론 통역사는 당연히 필요하다.
번역기에서 어떤 언어의 문화적 차이까지 잡아내기는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라간의 통역이라던가 기업간의 회의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는
당연히 통역사가 필요 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어떨까?

일반 사람들이 외국어가 필요할 때는 단지 여행을 할 때 뿐이다.
그렇다면 TTT(Text To Text)와 TTS(Text To Speech) 기술을 이용하면
여행은 충분이 가능할 것 이다.

단순한 여행에서 필요한 것은
의식주를 위한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할 뿐이다.

이 경우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다면,
무료로 앱을 다운받아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실 이는 온갖 몸짓을 사용한다면,
이런 기술도 필요 없이 충분히 원하는걸 얻어낼 수 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된 이야기이다.

이에 따라 언어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니
여행을 갔을 때의 가장 불편한 점인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해결 되었다.

따라서 일반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울 필요성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외국에서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사용 할 수 있고, 충분히 커뮤니케이션은 가능 하겠지만
그 쪽 문화에 익숙해져야하는 외국인에게는 외국어를 직접 사용하면서
공부하는게 더 좋은 방법이다.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여기에 기계가 들어간다는 것이 아직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어떤 이유로 사람의 인식이 달라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기계가 끼어드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마 자연스럽게 우리는 실제로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까지 지금 시점에서 외국어 공부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보았다.

결론적으로 지금 시점에서 여행 목적으로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실상 지금의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어 공부는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문서의 경우에는 아직 까지는 조금 어색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3년내에 이 정도의 놀라운 발전을 본 바로는 멀지 않은 미래에
문서의 경우에 쉽게 문맥을 이해할 정도로 발전하지 않을 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언어의 문화적 부분까지 캐치해야 하는
나라간 나라 라던가,

기업과 기업에서의
중요한 회의의 자리에서는 통역이 당연히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변역기에서 이 문화적 부분까지
잡기에는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기에서 이런 관습, 예의 등에서 나타나는 문화까지
번역기에서 잡아낼 수 있다면,

일반인들이 외국어를 배워야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고

과거 선조들이 살아왔던 세계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직업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짐에따라

어쩌면
통역사라는 직업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번역기에서
그런것 까지 모두 잡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또한 모두 잡아낸다고 하더라도
아직 우리들에게 기계가 우리들의 목소리를 대신한다는
사실이 그것이 유용성이 높다고 한들
아직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적어도 예전과 같이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많이 줄어 들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나는 아무런 철학적 논의 없이 
외국어에 집중하기보다

좀 더 나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
다른 것들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외국어를 배운다고 해서
내 미래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보장은 없으며,
일반적으로 국내의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고,
외국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물론 나가는 사람은 꽤나 있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대게 1~3년 내에 다시 모국으로 돌아 간다. 

이는 외국어가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낙관론자들이 결코 말하지 않는 사실이기도 하다.

내가 다니는 회사만 해도
그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나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왜 영어를 배워야하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없이
단순히 영어를 배웠어야 했던 시간들은

나에게 무척이나 괴로웠던 시간들이였으며,
결과적으로
나에게 큰 이점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한국에서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배운 이유는
단순히 시험에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이지

결코 가까운 미래에 혹은 
미래에 외국에서 살기 위함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본래의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며,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다수의 어른들에 의한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단계를 정량화하면 
정량화 할 수록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 사람의 포텐셜은 
결코 정량화 할 수없다는 것이다.

정량화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 수록
포텐셜은 감춰지고, 결국 희미해진다.

목적에 벗어나는 것을 떠나
목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런 다수의 어른들 중 일부는
자신은 타인의 미래를 위해 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떠한 미래인지 
철학적 고민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디에 흥미가 있고, 어느 것을 잘하고,
어느 것을 못하며
스스로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데 

어떻게 당사자의 미래를 위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 하는 미래를 위한다는 조언은
자신이 그리고 있는 미래를 당사자에게 강요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최악의 상황은
스스로의 컴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미래 위함이라는  당자사에게 떠넘겼을 때 인데
당사자의 인생 전체를 바꿀 정도로 큰 악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스스로 자해하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에 쉽지 않지만,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타인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 처럼 
대단한 경험을 한 것 처럼 이야기하면서
알량한 자존심을 채우기 위함이거나
(이 경우가 가장 질이 나쁘다)

혹은 그들의 교육 솔루션을 팔기 위한 
비지니스를 하고 있을 뿐이지
타인의 미래에 대해 관심은 대게 없다.

물론 그러한 마음이 조금은 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주 목적은 비지니스지, 
타인의 미래를 생각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타인의 미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너무 나도 강렬해, 
나의 솔루션을 꼭 이용해라라는 것 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경우가 얼마나 되겠으며,
그들이 이야기 한대로 따라갔음에도 불구하고
희망 찬 미래는 커녕 지옥과 같은 미래가 현실로 다가온다면

그들은 그들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그들이 할 말은 뻔 하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너의 노력이 부족했다'라며 사회적 권위나 위치,
그리고 자본으로 윽박지르며 압박할 것이다.

역으로 
그러한 사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하더라도 그러한 
낙관론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낙관론자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 머신을 손에 쥐고 있지 않은 이상 
현실로 다가온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모든지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소식이겠지만
한 마디로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비지니스를 하건, 
그러한 타인의 미래를 걱정했던
그들은 책임지지도 않으며, 책임 질 수 도 없다.

책임질 생각이 없다면,
그들은 정확히 비지니스를 하고 있는 것이고,

설사 책임을 질 생각이 있더라하더라도
타인의 한 인생을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타임 머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 하다.

따라서 선택은 스스로 하고, 
이에 따른 책임 또한 스스로 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자신을 스스로 어른이라 자칭하는
수 많은 낙관론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전혀 없다.

시간이라고 쓰고 노력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말은 
조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애매모호 하기에
너무나도 가치가 떨어진다.

목적과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노력으로는 
과정에서 나오는 직감들을 캐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직감이 없으니 선험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시간들 덕분에
어느 정도 영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부정할 수 는 없지만,

거기에 투자한 시간에 비하면
그것이 큰 이점을 가져왔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며,

그런 관점에서 저울질을 해보면
오히려 시간 낭비였다.

생각해보아라,
일반적으로 초,중,고에 거쳐서 대학까지 가서 졸업한다면
24살 정도 되며 8살에 초등학생 1년이 된다고 치면

약 16년 동안, 단순 계산으로 
하루에 한 시간 씩 외국어에 투자했다면
5840 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정상적인 교과 과정을 이수 했다면
무책임한 사람들에 의해 
그 시간 만큼 시간을 버려진 것이다.

여기에 1/5를 한다하더라도 
대략 1000시간의 시간이 나오며,
그 시간 만큼의 수 많은 
진정한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1/10를 해도 
달라질까?

전혀 아니다.

100시간 이던 1000시간이던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잠재력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 속에서 몇 번 밖에 오지 않는 
기회가 그 100시간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또한 한 나라의 언어라는 것은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뉘앙스를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모국에서 이를 훈련하지 않는 이상 
이를 캐치하기 매우 힘들다.

심지어 모국에서 생활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뉘앙스를 캐치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주의가 필요하다.

이는 외국인이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모국에 산다고해도 
수많은 성찰과 훈련이 필요한 부분인데 
외국에서 이를 어떻게 배운다는 말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패턴으로 
그러한 문맥이 완성되는지를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파악하기조차 힘들다.

즉, 고작 외국에 몇년 산다고 해서
단어와 문장속에 내제되어 있는 
이러한 뉘앙스를 이해하기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국에서 배우지 않고
훈련하지 않는 외국어는 
결국 언어를 언어로서 이해하기 힘들며

고작 2살 수준의 언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 많은 돈과 수 천 수만 시간을 쏟아부어야만 한다. 

생각해보아라.

왜 초등학생 부터 고등학생까지 
조금 더 길다면 대학생까지
그러한 과정에서 '영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영어는 늘어나지 않는 것인가?
멍청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는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이러한 방식과 결과물에
어떤 유용성이 느껴지는가?

정말로 스스로 유용성이 느껴진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그 중에서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깨진 독에 물을 붓기 싫을 뿐이다.

잘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용성이 느껴진다면 나는 엄지를 치켜들 수 밖에 없다.

그 길에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다만,
다른 선택한 개인들에게 다른 선택을 했다는 이유로
핍박한다면 이야기가 매우 달라질 것 이다.

따라서
1000시간이건 100시간이건
스스로의 시간은 자신만의 것이고,

할지 안할지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책임 또한 스스로의 것 이다.

당장 내일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예측할 수 없는데,
타인이 어떻게 
타인의 10년후 20년 후를 예측한다는 것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나와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자라온 세대들이
충분히 공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감은 하지만,
흔히 말하는 어른들에 의해 입이 봉쇄되어지는
그런 논제이기 때문에
언급해봤자 힘을 받을 수 없는 논제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다른 언어들을 배우면서 느껴왔던 것은

그 언어를 꼭 배워야만 하겠다면,
정말 기초적인 것만 배우고
그 나라에서 살아가면서 터득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것만 배우고 가면
처음에는 힘들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나라에 살아가면서
빠르게 언어가 향상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회사에서도,
그 나라의 사회에서도 좋게 평가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모국에서 1년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 보다
그 외국어를 본국에서 사용하면서 1개월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생각해보아라,
한국에서 일을 하러온 외국인이 처음에는 
몇 단어로 의사소통을 하다가 

어느 순간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문장이 아니라 
정말 회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위 한국인들이 그 외국인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는 딱히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는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이러한 이점들을 맛 보았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내가 좋은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 이다.

물론 외국에 살아갈 생각이 없더라도 
외국어를 배워야한다는 목적과 그에 따른
목표가 확실하다면
나는 그것 보다 훌륭한 것이 없다고 생각 한다.

이는 외국어 뿐만 아니라
모든 배움이 그러하니깐 말이다.

하지만 
그런 목적과 목표 조차 주입하려 한다면
혹은 주입되어 버린다면
상황이 크게 다를 것 이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미래를 위함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침을 튀면서 
주장하는 미래가 
다가오지 않았을 때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노력하지 않은
너의 책임이라고 말 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그들은 다른 타인에게 
관심 따윈 없었고
그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어른'이라는 권위를 낮추고 싶지 않아
상황을 회피하거나 모면하기 위해 
조언을 하는 척만 했을 뿐
아무런 가치 없는 말을 내 뱉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것은
이러한 상대를 기만하는 것에서 온다.

이에 더해 자기 기만까지 더 한다면
재앙에 가깝다.

이러한 것이 
그들이 말하는 공부라는 것 인가? 

그것을 과연 배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왜 배워야하는지를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생각이 행동과 일치해야 해야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걸음 다가 설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진정한 배움에 다가갔을 때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는 
무책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목적과 그에 따른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대상이 
타인이라면 그러할 자격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며,
흔히 말하는 천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포함해,

무책임한 어른들에 의해 받았던 교육들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그리고 거짓으로 가득차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쓸모 없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최소한 기만적인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떤 어른들이 입버릇 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그런 외국어를 공교육에서 배웠다면
외국어를 배우는데 힘들지 않았을 탠데'
라고 입을 모아 말한 다는 점이다.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고,
사회의 큰 파도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유연해야되는데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생의 배움의 시기는 학생 시절이 끝이라 생각하며,

유연하지 못해
사회의 큰 파도에 휩쓸려가는 자들이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은가?

인생의 배움의 시기가 학생 시절이 끝이 아니라면
20세던 30세던 40세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은 단지 과거도 현재도 
배움을 원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굳이 20세 이전에 모든 것을 배울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할 수 도 없고 

오히려 결과에 상관 없이 대부분 
인생의 엔트로피만 
급속도로 쌓아가는 결과 밖에 낳지 않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엔트로피가 쌓여간다면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한국 사회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또한 
이러한 문제는 사회 문제로 이미 대두되고 있다.

무책임하고 극도로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이 왜 명문대라는 권위에 집착했는지
조금은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다.

배움의 시기를 스스로 엄격하게 한계를 정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를 
사회적, 경제적인 지위를 이용해 
타인에게도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술이 발전이 빠르고,
패러다임의 변화가 다른 업계에 비해 빠른
IT업계에서 나는 저런 사람들을 수 없이 봤다.

과연 그들이 변명하며 이야기하는 것 처럼
정말 자신이 외국어를 과거에 배웠으면,
그 기술을 과거에 배웠다면,
정말로 그의 삶이 나아졌을까?

그의 미래인 지금도
이런 배움을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과거로 가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면
그는 과연 진정한 배움을 원했을까?

한국에는 이런 뉘앙스에 말이 있지 않은가?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런 말에 따르면,

그가 그렇게 된 원인은
그의 과거는 배움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미래 또한 배움을 원하지 않아 
세계의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파도에 휩쓸린 것 뿐이다.

전 세계에 있는 것들을
정확히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지식들을
모두 배울 수는 없기에

외국어든 뭐든 배움이라는 것은
그리고 배운다는 것은 최소한만 배운 다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탐구를 끊임없이 하는 수 밖에 없다.

또한 
지식 자체만으로는 유용함을 나타낼 수 없다.

과거에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도 유용했던 이유는 
단순히 정보의 비대칭이 강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의해 정보, 지식이 공유됨으로써 
비대칭이 대부분 해소된 이 시점에서

단순한 정보 지식은 
낙관론자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유용성이 크지 않으며, 
너무나도 과대 평가하고 있다.

데이터 자체에 유용함이 없는 것과 동일하게
지식 자체에 유용함은 대게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과 지혜는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스스로의 직감을 통해 생성된 선험과 
이를 가공해야만 가치 있는 정보가 되고 
정말로 유용한 지식이 되는 것이다.

마치 흔히 컴퓨터 이론서에서 말하는 
정보를 가공해야만 데이터가 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직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탐구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탐구는
단순히 자격증을 위한, 높은 시험점수를 받기 위한
그런 외적인 것을 위한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실행하고 
그 과정에서 앎의 즐거움을 느끼는 
정말 순수한 '탐구'다.

어린 시절에 단순히 식물이나 개미를 보며
즐거웠던 그 순수한 탐구 말이다.

이는 외국어든 IT 업계이든 간에
인생을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모두 동일한 이야기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적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중에 진리는 
그 극히 적은 것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이다.

여기에 높고 낮음이 어디있겠는가?

적어도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통달한
'자애로운 현자'란 이제 껏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런 척 하는 비열한 인간들이 많이 있었을 뿐이다.

이에 여전히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가고 있는
한국의 나의 다음 세대들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와 같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영어라는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매우 안타깝게도 이미 관습으로 자리 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 또한 나와 같이 
이러한 외국어라는 족쇄을 달고
유년 시절을 보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어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사회의 어른들에게 인정 받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대게 타인에게 관심 따윈 없는
자칭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내 다음 세대도 
내가 그랬던 것 처럼 선택해야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는 이상
모든 것을 할 수도, 가질 수 없다.

그렇기에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를 배우고, 자격증을 따는 것 보다
이유 없는 끝 없는 지식을 쌓아가는 것 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못하는지를 
파악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리소스를 최대한 활용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으면서,
어떻게 타인에게 더 많은 유용성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사회는 언제나 
스스로 무거운 리스크를 등에 엎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유용성을 제공해 준 사람들에게 큰 몫이 돌아 갔다.

과거에는 왕과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갔던 몫이 
현재에는 자본주의라는 여과기를 거쳐  
사회에 라는 큰 틀에 뿌려지고 있는 것 이다.

다수의 타인에게 높은 유용성을 제공 해 줄 수 있을 때
사회에서의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자아 실현과 자본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며 
비열한 어른들이 그토록 원하는 
권위이나 권력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

그리고 나의 리소스가 충만해질 그 시점에
그리고 인생에서 몇 번 오지 않는 
기회를 발견했을 그 시점에

실제로 생각했던 방법론을 
실행 할 수 있는 것도록 하는 것이 
정말로 미래를 대비한다고 나는 생각 하고 있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좌절, 실패, 성공 등과 같은 
모든 것들은
이런 것에 비하면 사소할 뿐이며,

이보다 더 욱더 외각에 있는 
자격증이나 시험 점수 따위 같은 것들은 
더더욱 사소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삶의 목표가 어떤 것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삶의 목표가 자격증이나 
시험 점수라는 사람은 나는 본 적이 없으며,
이보다 우스운 것이 없을 것이다.

어른들이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 
혹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프레임 워크에 갇혀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한 프레임 워크안에서의 
이루어지는 10명 중 9명이 원하지 않는 게임은
결국 의자 뺏기 싸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를 경쟁이라 말하지만 
현대에 통용되는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말하는 경쟁은 
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이라는 게임의 룰에 가깝다.

약육강식이라는 경쟁 게임은 
종에 따른 짐승들의 경쟁에 가깝다.

이 게임의 룰은 
나의 종에 따라 천적과 포식 상대가 결정된 상태에서 하는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는 일반적으로 협력과 타협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짐승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짐승 취급을 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비열한 어른들은 
이 게임을 할 이유가 분명한데
자신이 약육강식에서 일방적인 '포식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대로 사회가 정말로 약육강식이라면
지금 처럼의 세분화된 분업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며

과거에 없었던 지금의 세계 무역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조금 타이밍이 어긋난 시대에 태어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대략 100년 정도만 일찍 태어났었어도
제국 주의 시대에 태어날 수 있으며
그 시대에는 강자인 서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 삼는
그들이 외치는 그 말대로 '약육강식'이 정당화되어 있는 시대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경쟁은 다르다.

현대 인간의 경쟁은 약육강식과 타협과 협력이 혼합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경쟁은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가 했을 뿐 이다.

물론 약육강식이라는 단순한 힘에 논리에서
게임이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그러한 논리에서만 돌아가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영원한 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내가 못하는 것을 상대가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건이던 재능이던 필요에 의해서 이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에 의해 
전 세계가 얽혀있는 것이고 이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순하게 자신의 솔루션을 파는 기업과 소비자를 관계를 생각해보자.

기업이 물건을 소비자에게 제공하기에 소비자보다 우위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소비자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기업은 회사의 존속을 고민해야 한다.

반대의 경우는 또한 어떠한가?

기업과 소비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관계가 그들이 침을 튀도록 이야기하는 약육강식일까?

사회가 약육강식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그런 관계였다면
위대한 기업이 선심 쓰듯이 
열등한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있지 않았을까?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계는 어떠한가?

국가라는 시스템과 
그 안의 국민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국가는 국가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국민들이 필요하며
국민은 국가라는 테두리안에 보호 받기 위해 
국가를 필요로 한다.

또한 세상이 복잡해졌기 때문에
더 고도의 분업화가 필요해졌고 
유용성 과거 보다 더 많은 협업이 필요해졌다.

이 상황에서 협업을 하지 않는다면 후퇴 말고 더 있겠는가?

내 옆자리에 있는 동료들은 물리치기 위한 
혹은 내가 더 나아가기 위해 짓밟기 위한 사람일까?

상대의 의자를 뺏기 위한 경쟁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평가 하는 사회가
무슨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옆자리 동료와 약육강식이라는 
룰 아래 경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동료가 아니라 적일 뿐이다.

적이지만 상대가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면 
결국 허리 뒤에 칼을 숨기며 
상대를 기만 하는 방법 말고는 무엇이 남겠는가?

그런 관계에서 신뢰라는 것이 있을까?

과연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가고자 하는 그리고 도달하고자하는 
저 높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현란한 말쏨씨로 아주 잠시 동안만은 
신뢰를 구축할 수는 있겠지만

신뢰는 쌓이는 것이며,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리소스의 대부분을 
모두 의자를 뺏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낭비이며,
모두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없다.

결국 자발적이여야만 하는 경쟁의 
진정한 빛을 잃어버리는 것 이다.

빛을 잃게 되니 끝은 가치의 소멸 말고 더 있겠는가?

의자 뺏기 싸움을 끝낸다 하더라도 
새로운 사람이 그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일 뿐
개인의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사회의 진보는 눈을 씻고 보이지 않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결국 신뢰라는 가치가 빛을 잃게 되며
그 끝은 신뢰의 소멸이다.

흔히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 걸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러한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권위에 도달하기 위해 모두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사회가 더 좋아지지는 않는 다는 것이며

자의에서 그렇게 하던 
강력한 타의에서 그렇게 하던간에
모두가 노력한다면 마치 운명처럼 
사회의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코리안 드림은 허상에 불과하다.

지금의 한국의 모습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점에 내 다음 세대 또한 
한국내에서는 그 다지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을 것 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어른들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아랫 세대들이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만든 틀에서 벗어나지 않게 
자신들이 만든 로드맵에 벗어나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바라며
자신들의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기 원할 뿐이다.

명문대, 대기업, 자격증, 토익, 토플과 같은 
자신들이 만들고 정해 놓은 바운더리 안에서 행동하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목줄을 쥘 수 있으며,
자신의 권위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오는 결과물이 합격, 높은 연봉, 
높은 사회적 지위 등의 좋은 것이라면 
그런 틀과 로드맵을 그려준 자신들의 덕분이고

불합격, 낮은 연봉, 낮은 사회적 지위 등의 
좋지 않은 것들은 타인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임을 돌리려고 하는 대상이 누구이겠는가?

잘 생각해볼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적어도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권위가 떨어지고
자신의 권력 또한 잃게 될 것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찍이 이를 알아차리고 
이에 벗어나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시도가 보인다면
어른에 의해 먼저 나이에 짓눌리게 될것이고,
그위에는 경험이, 

그 다음에는 사회적 지위나 권위에
마지막에는 그런 다수의 어른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라는 무게를 감당해야할 것이다.

물론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모두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전설 처럼 내려오는
저 먼 산골짜기에 있는 도인에 도달한 사람들 뿐이다.

그런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도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노력이 부족했다고들 한다.
 
심지어는 게을러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노력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어떤 것을 하더라도 같은 노력을 한다고 해도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환경, 적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며,
성취 할 수 있을 때까지 도달하는 기간도 다르다.

또한 노력이라는 것은 정량화 할 수 없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는 것 이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노력이 아닌 
정량화 할 수 있는 시간에 가깝다.

단순한 시간을 추상적이고 
비교적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노력이라는 것으로
치환해 그럴 듯하게 꾸민 것이다.

왜냐하면 10000시간을 들여 
어떤 목표에 달성 했다는 이야기보다
꾸준한 노력을 들여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더욱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이고,

정량적인 수치를 이야기하기 보다
애매하게 말하는 것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 시간을 들여 자신의 목표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지만
만 시간을 들여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무관심이라는 경종을 울릴 뿐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를 애써 무시하려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100시간을 들이면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가정한다면 
만약 100시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다수 있다면
그 사람의 정당성이 떨어지고, 신뢰를 잃고
그 결과 권위가 떨어지기 때문에 리스크가 꽤나 크다.

하지만 이를 간단하게 
모호하고 꽤 나 높은 가치를 지닌 노력이라는 단어로
치환한다면 책임을 회피 할 수 있다.

10시간이던 100시간이던 1000시간이던
심지어 10000시간이던 성취를 이루었다면
그들의 말은 정당하다.

반대로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말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정확히 정량적으로 
몇 시간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법의 단어가 
바로 한국에서 노력이라는 단어이고
한국의 비열한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책임지고 싶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경우에도 
지는 것을 싫어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경쟁은 자발적이여야만 하듯이
노력 또한 자발적이여야만 한다.

노력외에도 혁명, 혁신, 배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이미 빛을 잃고 가치를 잃어버린 
경쟁 이라는 가치가 걸었던 길을

높은 가치를 지닌 행위들이 똑같이 그러한 길을 걷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이미 빛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진정한 노력도 혁명도 혁신도 배려도 
그럴듯한 행위로 치환되버리고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하다.

비교적 최근에 이슈였던 재능 기부 또한 
타인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였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인
비열한 어른들의 의해 
자발적이여만 빛이나는 재능 기부 또한 빛을 잃었다. 

이제는 어떠한 높은 가치가 사라질 것인가?
배려는 이미 빛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사회가 
정확히는 전 세계가 
이렇게 빠르게 변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그들이 말이 옳았을 수도 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스마트폰이 세상에 등장한게 놀랍게도 고작 10년 전이고,

인터넷의 발달로 무엇이 정말로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이 없더라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지금 
코로나라는 전 세계적인 위기를 통해
세상의 변화가 좀 더 앞당겨 졌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열한 어른들의 뻣뻣한 고개는 숙일 줄을 모르는듯 하다.

그렇기에 내가 이런 의문들을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할 것이라 생각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실제로 그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온 나를 포함한
나의 세대들의
대부분은 그러한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말을 입밖으로 낼 수 없는 이유는
그러한 어른들의 생각과 행동이 너무나도 타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칭 어른들에 의해

저 높이 있는 관악산에 사는
인간을 초월한 도인들을 보라며,

'너희들이 좀 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 뿐이다'라며,

나이 부터 시작해 사회적 지위 까지
온갖 권위를 다 내세우며
입을 막으려 할 것임은 틀림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영어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외국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입이 부르틀 정도로 강조를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외국어를 공부하지도,
외국어를 어느정도 유창하게 할 수 있지도,
그런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을 한 사람은 드물며,

그런 외국어에 대한 유용성에 대해
유용할 것인지 아닐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논의하지는 않는다.

외국에서 일할 생각도 없는 국내에 사는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외국어를 배우는건 매우 시간 낭비이다.

낚시를 할 일이 없는데, 
물고기를 낚는 법을 배워봤자 어디다가 쓰겠는가?

고작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며
쓸 때 없는 자랑 거리 밖에 되지 않을 뿐이다.

스스로 이유가 충만해,
정신과 육체가 이끌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위에 유용성을 찾기란 힘들다.

또한 매우 안타깝게도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더러
성적표, 자격증과 같이 가슴에 달 수 있는 훈장이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나의 이런 주장에
'언젠가는 필요하지 않겠냐'면서 
남의 인생을 망치지 말라고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언제가 도대체 정확히 언제라는 말인가?

5년후? 10년후? 
아니면 죽은 후에 갈 것인가?

언제 갈지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지 
타인이 정하는 것이 아니며,
미래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나 또한 외국에서 일하게 될 줄은 
그리고 외국에서 살아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끔찍하게도 그들에게 휘둘려 
내가 만약 그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면,
혹은 그들에 기만에 동요했다면 

나는 지금 쯤 과거에 그들이 해야만 한다는 
‘공부’를 하지 않았던
내 스스로 비난하고 힐난했을 것 이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에
그런 말을 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정말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런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하면서 
오지랖을 부리는 것 보다
서울역 한 복판에 돗자리 까는게 더 좋을 것이다.

그런 말은 스스로가 
그에 대한 책임질 수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다'라며 
몇 십 년 동안 붙잡아 놓게 하는게 너무 무책임 하지 않은가?

'언젠가'가 평생 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책임 지겠다는 것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재미있게도
나 또한 한국에 살아가면서 수 없이 들어왔고 
몇 십 년동안 영어라는 외국어에 붙잡혀 살았으나

한국에 살았던 28년 동안 배웠던 영어는
영어권에 사는 3살베기 꼬마 아이들 보다 못하는 수준이다. 

물론 이에 
너의 노력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다른 산에 살고 있는 '도인'들 보라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겠지만, 

그런 도인들과 나의 영어에 대한
유용성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3살베기냐 초등학생 수준이냐의 차이 일뿐
비지니스를 할 수준의 레벨은 결코 아니다.

그런 외국어에 무슨 유용성이 느껴지는가?

나는 아직까지도 전혀 유용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나은 정도로는 유용성을 논하기 턱 없이 부족하다.

물론 유용성이 느껴진다면,
나는 그저 열심히 하라며,
훌륭하다며 박수 칠 뿐이다.

다만, 타인에게 이를 강요한다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이다.

만약 이런 모든 인과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그런 무책임한 행위를 했다면,
그것이 괴물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런 괴물에게 인간 취급을 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처럼 충분한 철학적 논의가 없으니

그들의 설득 방법은
자신들의 아랫세대에게
논리적으로 어떤 행위에 대해 정당성과
타당함을 이야기하며 설득하기 보다는

자신의 나이나,
사회적 지휘를 들먹이며 
윽박지르거나 협박하는 방식이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 일지도 모르겠다.

무책임한 어른들의 말 처럼 
미래에 올 수 있는 대부분의 고통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고통을 차단하려고 할 것 인가?

하지만,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고, 
그 고통속에서 얻는 성취감이라는 달콤한 열매는 

인간을 그리고 스스로가 본래 가지고 있던
기반이라는 틀에 새것을 더하는 과정을 
과속화시키고 진보하게 만든다.

물론 무책임한 어른들의 말 처럼
미래에 올 수'도' 있는
모든 고통을 가능한 차단하기 위해 
시간이라는 이름의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할 것이다.

고통이라는 리스크가 없는 만큼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은
그리고 그런 성취감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성장은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진보는
그 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고통보다 쉽게 찾을 수 있는 
동기 부여 매체는 단언컨데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높은 리스크를 스스로 짊어진다면, 얻는 성취는 많을 것이며,
낮은 리스크를 스스로 짊어진다면, 얻는 성취는 그 만큼 적을 것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자랑하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시장인 주식 시장도 마찬가지 아닌가?

리스크가 높은 주식을 산다면,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한국의 무책임한 어른들은 
다음 세대들에게 리스크를 낮추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

똑같은 경로로, 똑같은 시험을 보며,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라고 강요 한다.

사회에서의 리스크를 계속 낮추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결국 계속 리스크를 낮추게 되었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가게 될 종착점은 어디인가?

행복한 삶? 부와 명예? 

결국 미래의 고통을 막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미래에 가져올 수 있는 포텐셜들을 모두 차단 한다.

왜냐하면, 그런 고통을 사전에 막기 위해 쏟아 부었던 
본래 포텐션들로 가득 차 있던 '시간'은 점점 소모되어
가지고 있던 포텐셜들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좀 더 근본적인 생각들을 할 시간을 차단시키고 
삶 속에서 끊임 없이 엔트로피가 팽창되고 터짐으로써 
내부의 재정렬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파충류들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다.

성장하기 위해서, 진보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자아 또한 이런 과정이 필수불가결하다. 

이러한 빅뱅 과정을 거치면 거칠수록
개성은 쌓이게 되고, 
그러한 개성 속에서 창의력을 끄집어내어
개인으로서 사회의 유용성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나는 외국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을 뿐
외국에 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회가 우연히 나에게 찾아왔고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친구, 가족, 자주 가는 카페 등의 
이미 구축되어 있는 삶의 인프라를 버리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어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험을 할 것인가를 말이다.

어느 것이 리스크가 큰가?

그대로 한국에 남아 있다면
나는 안정된 인프라를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대로 어른들에 의해 
짓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고,
새로운 삶과 내가 원하는 성장은 
크게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방인의 삶을 선택하면
어른들에 벗어 날 수 있고, 
새로운 문화, 사람, 언어 등을 보며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신 28년간 구축했던 인프라를 버려야 하며
언어, 문화, 친구 등의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모든게 낯설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도 그 만큼 클 것이다.

많은 고민 끝에 나는 이방인의 
28년간 겪어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뻔히 보였고, 
내가 원했던 성장은 물론이고, 삶 또한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방인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리스크를 높이고 
기대 할 수 있는 성장치를 높인 것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그러한 리스크 중 몇가지는 현실로 다가왔고
나는 리스크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또한 한국에서 이상한 녀석으로서 
괴롭게 살아가는 것 보다 

차라리 외국인으로서 
이상한 녀석으로 취급 받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더 편안할 것이라 생각 했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으로서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의 삶을 선택 했다.

나에겐 이유가 충분 했다.

이런 나의 선택에 자칭 어른들은 몸부림을 칠 것이다.

아마 내가 한국에 계속 남는 선택을 했다면
어른들의 말처럼
'그래도 한국보다 나은 나라는 없다'는 말에 휘둘렸다면 
무책임한 어른들에 의해 짓눌려지고,

지금과 같은 
성취감도 성장도 없는 삶을 살아갔을 것 이다.

이처럼 무책임한 어른들의 말 처럼 
리스크를 낮추는 행위를 하면 할 수록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게 되고,
내면의 성장은 꿈도 꿀 수 없으며
이로서 포텐셜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언제 사용할지 모르는 
영어를 수 십 년간 강제로 배워야 하며, 
언제 사용할지도 모르는 
증명서로서 자격증을 따야만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용할지 모르는 
코딩이라는 물건을 쇼핑 바구니에 담는것 처럼 
이러한 위시 리스트에 포함 시키고 있다.

그러고는 역설적이게도 다음 세대들에게는 
높은 창의력, 높은 성과
즉, 사회에서의 높은 성취를 요구 한다.

사회의 높은 성취는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인 논의 없이 말이다.

자칭 어른들의 말처럼
명문대라는 권위를 손에 넣는다면 
수 많은 토익, 토플, 자격증을 포함한 
수 많은 증명서들을 손에 넣는다면,

그리고 그들의 말처럼 
가능한 모든 지식을 쌓아간다면
사회에서의 높은 성취는 마치 운명과 같이 따라오는 것 일까?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한국의 미래는 매우 어두워 보이는건 나의 착각일까?
아직은 그러한 운명의 시기가 아닌 것일까?

사회에서의 높은 성취는 결국 
내가 얼마나 사회에 유용성을 제공해줄 수 있느냐이지
얼마나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증명서의 갯수가 몇 개인지가 아니다.

권위와 증명서는 
사회의 솔루션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유용성을 제공해주기 위해서는
끝이 없는 지식의 깊이도, 
높은 사회의 권위가 필요한 것이 아닌

인간 그 자체와 
그러한 인간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에 
대한 순수한 탐구가 필요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리소스들로 이를 
어떻게 제공할지에 대한 솔루션이 필요하다.

즉, 학자와 같은 깊은 지식을 갈구하는 사람이 아닌
뛰어난 비지니스 감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사회에 높은 유용성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며,
비열한 어른들이 그렇게 원하는 
자본도 권력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돈이던 시간이던
아니면 인생이건 간에 리스크를 받아들여야 한다.

미디어에서 수 많은 한국의 훌륭한 어른들이 나오지만
그런 것 치고는 이상하게도 
사회는 역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하지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듯 하다.

리스크에 대해 어떠한 어른들은 
도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내가 슬롯머신에 돈을 넣은 다음 할 수 있는 행동은 
레버를 내리는 것 뿐이지만,

리스크는 리스크라는 자원을 넣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마치 슬롯머신에 777이 나오는 것 처럼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고작 작은 나비의 날개짓 이라도 
태풍을 야기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또한 리스크의 경우는
다가올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해 
수 많은 방법으로 대비할 수 있지만

슬롯머신은 777이 나오지 않았을 때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코인을 더 많이 준비하는 것 밖에 없다.

결국 리스크를 받아들이는 것은
도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생을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그들의 말 처럼 인생이 도박이라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밖에 가서 낚시를 하던, 게임을 하던, 도박을 하던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박혀 있어도
어처피 운명이라는 것에 이끌릴텐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최근에는 운명이라는 말 보다 
유전의 탓으로 돌리는 듯 하다.

결국 그러한 관점의 끝에 남는 것은 허무함 밖에 없다.

내가 앞으로 나아질 것이고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데
성장 할 수 있겠는가?

성장하기 위한 동력은 허무함이 아니다.

희망이다.

그러한 무책임한 어른들에 의해 
낮은 리스크에 익숙해진 
다음 세대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회적으로 낮은 리스크를 지니고 있는
대기업에 몰리고
이마저도 여유치 못하다면, 공무원에 몰리고 있다.

이는 정말로 우연의 일치인가?

우연이 아니라면 무책임한 어른들의 말대로
젊은 세대는 야망이 없고, 패기가 없으며
도전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사회의 권력이라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양치기들이
적절한 곳으로 양을 몰지 못했기 때문일까?

만약 그들이 적절한 곳에 양을 몰지 못했다면
권위 라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현자'나 '도인' 아닌 
같은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인간으로서
 
비교적 같은 테이블에 앉아 
협상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조금 더 나은 정도로는 
뛰어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매우 안타깝게도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아직 까지 도출해낼 수 없었다.

어쨋든 이러한 사실을
내가 나이를 들어가면서,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국어를 배울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게 좋지 않나 싶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유한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며,
무책임한 어른들에 의해 휘둘러지고 
사용되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깝기 때문이다.


2019/12/25
 역 근처 스타벅스에서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 Web ] 웹 애플리케이션 아키텍처 (Web Application Architecture)

[ Web ] 웹 애플리케이션? 웹 사이트?(Web Application? Web Site?)

[ Web ] 서버 사이드(Sever Side) ? 클라이언트 사이드(Client Side)? 1 [서론, 클라이언트 사이드(Client S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