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ssay - Technology, Essay - Intuition ] Chat GTP시대의 도래와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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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드디어 끝이 보이는 듯 싶다. 최근에 회사의 망년회를 끝내고 이래저래 회식이 늘어나는 듯 하다. 지금 시점에서는 개인적인 스케쥴도 마무리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여유롭게 연말을 즐기며 올해를 마무리 하려고 한다. 비교적 최근에 이사한 곳 근처의 스타벅스가 대학 병원 안에 있고 근처에 공원이 있어서 그런지 개를 대리고 산책하는 노인이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눈에 띄게 보인다. 꽤나 좋은 곳으로 이사한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드디어 미루고 미루었던 이직을 하였고  그 이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니  분명 안좋은 일도 있었지만 만족할 수 있는 해를 보내지 않았나 싶다. 내가 도달하려고 하는 곳으로 가려면 아직 갈길이 멀지만  궤도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면 큰 성과 일 것 이다. 어쨋든 이직하고 많은 일들을 맡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Chat GTP를 활용하고자 하였고 몇 가지 직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 중 한 가지를 글로 작성하려고 한다. 따라서 올해의 마무리 글은 Chat GTP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서론 불과 약 10년전 IT업계는 원하던 원치 않던간에  한번의 큰 패러다임의 변화를 맞이해야만 했다 바로 아이폰의 등장에 따른 스마트폰의 시대의 도래와  이에 따른 IT업계의 패러다임 변화가 그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아주 격변의 시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게임은 물론이고 웹과 백신을 비롯한 모든 솔루션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 뿐만 아니라 가볍고 한손의 들어오는 이 디바이스는  그 당시에는 조금 비싸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뛰어난 유용성으로 회의론을 금세 종식시켰고 이에 대한 결과로 어린아이 부터 노인 까지 작은 컴퓨터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당연하게도 IT업계의 전체적인 호황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질서는 다시 한번 재정렬되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의 증거로 언어 또한 변하게 되었는데...

[ 생각 ] 나의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대학을 보내는대 집착한 이유에 대해


오늘은 한국에서 나에 세대의 부모님들이 왜 자식들에게 대학을 보내려고
집착했는지에 대해 지금 시점에서 내 나름대로 분석해보려 한다.



나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대학에 꼭 보내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단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나와 형에게 강제적으로 공부를 시켰다.

나의 친구들이 그랬듯이 나와 형은 학원에 무조건 다녔다.

적어도 나는 공부가 하기 싫었고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학원을 빼먹은적도 많았고 들켜서 혼난 적도 많았다.

그 때는 어렸기 때문이였을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다들 했으니깐, 부모님이 시켜서 라는 이유로 좋아하지도 않은 공부를 했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애들은 똑같은 생각 인지라,
학원이 끝나면 자주 피시방에 가서 놀고는 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대학을 다니고, 졸업을 하고
외국에서 일을 하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왜 나를 공부를 시키려고 했을까?
더 넓게 생각해서 왜 나의 세대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대학을 보내는데
집착을 했을까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러면 한번 부모님의 관점으로 생각해보자.

나의 부모님은 지금 두 분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젊었을 시절에는 두 분다 평범한 블루 컬러인 공장 노동자였다.

아버지는 아마 어떤 운송업을 하셨던 것같고,
어머니는 내 유치원 근처에 있는 미싱질을 하는 일을 했었다.

그 시절에는 대학 등록금이 비싼 편이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평범한 가정집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모두 공장에 취직했다.

그 시대에 대학을 갔다고 해도 농업 기반이였던 집이 많았기에
집의 중요자산인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내기도 했다.

나의 부모님은 그런 시대에서 결혼한 평범한 남성과 여성이였다.

그렇다 보니 대학을 졸업하던 사람의 수가 매우 적었다.
게다가 그 시절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경제 성장을 이루던게 한국이였다.

따라서 국내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필요 했을 것 이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보면 아무나 뽑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했었거나 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연봉이 높고 중요한 일을 해야하는 직책으로 뽑았을 것 이다.

당연한 선택이다.
내가 그 당시 상황이였다면, 그렇게 뽑았을 태니 말이다.

그 시절에는 신뢰도가 높은 인재가 사실상 없었다고 본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고급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대학 이라는 곳에서 밖에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의 부모님 세대들은 아무리 봐도 자신 보다 뛰어나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자신 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 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을 봤을 것 이다.

그것을 본 것이 대학을 가지 않은 나의 부모님 또는 부모님 세대들 이다.

그 것을 본 부모님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대학을 들어가는 것이 무조건 중요하구나라고
생각을 했던 것으로 나는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대학에 들어간적도 공부를 제대로 해본적도 없으니
자식들에게는 왜 공부가 중요한지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었다.

대부분 듣던 이야기는 '대학에 가면 니가 하고 싶은거 다 하라.' 또는
'일단 대학에만 들어가면 된다.' 라는 말 뿐이였다.

그렇게 나의 또래들은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부분 왜 대학을 다녀야하고,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 없이
졸업장밖에 얻지 못하고는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이게 지금 한국의 사회적 큰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다.
바로 나와도 관련이 있는 지금 젊은 세대의 취업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또한 길어질 것 같고,
오늘 주제와 맞지 않으니 다음에 하기로 하자.

오늘은 부모님 또는 부모님세대들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는대
집착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많은 인터넷 글, 친구들 혹은 형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한 것 이기 때문에
아마 추측이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본다면 나의 또래들은 부모님들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부모님들 말대로 자식들 좋으라고 하는 말이니 거짓은 아니다.

적어도 나의 부모님은 자신들이 할 수있는 
최선을 다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자식 세대에게 
한 이 기만 행위는 현재의 한국의 큰 사회 문제를 야기 했기 때문에
그 죄업으로 부터는 벗어나기는 힘들 것 이다.

그들은 그들의 자식들에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 했지만
충분한 고찰과 성찰의 결과물로 빚어낸 비전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몇 가지 사실에 의한 얕은 추론으로 빚어낸 예견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한 예견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수 많은 시스템들은 
사회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도록 훌륭하게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문명이 짧은 시간내에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예측의 많은 부분들이 맞았을 수도 있다.

영장류와 공통 조상 이후 도구를 만들 때 까지 약 400만년이 걸렸듯이
단 1세기만 이라도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실 그 예측이라는 것도 선험적인 통찰에 가까운 것이 아닌
경험에 의한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측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관측한 순간 만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양자 세계관처럼 
경험에 의해 관측한 그 시점, 
즉, 예측과 예견도 그 시대 상황에서만 올바른 것 이다.

만약 그 예측과 예견이 다른 시대에서도 통용된다면 
인류는 우연히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니 매우 기쁜 소식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인류가 손에 넣은 진리는 매우 적으며
과학사를 살펴봤을 때,
그러니깐 멀게는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과 
가깝게는 양자역학에 대한 논쟁까지를 살펴본다면

진리라고 인식되어있던 것이 
정말로 진리인지는 확실치 않으며,
이 세상은 빠르던 느리던 움직이고 있다.

예측과 예견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 이다.

누군가의 의도로 세상을 고정시킬 수는 없다.

내가 주로 비유하는 것 처럼 패러다임의 변화는 쓰나미와 같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 재해 인 것 이다.

그렇다고 충분한 고찰과 성찰의 결과물로 빚어낸 
비전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분명 아닐 것 이다.

하지만, 충분한 고찰과 성찰로 인해 
왜 그러한 비전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어느 부분에서 잘못된 판단을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정말 큰 차이 이다.

이런 과정에서 결과로서 실패라는 것이 나타나는데
이 속에서 나타나는 고통 속에서 인간은 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장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의 새로운 포텐셜을 발견할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게 고통이 없다면 
비약적인 성장은 이룰 수 없다.

이러한 비약적인 성장이 없다면 
비교적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고통 없는 성장은 
비교적 누구나 경험 할 수 있는 것 들이기 때문에 
우위를 점하기 힘든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인간의 삶에서 절반은 잠을 자야하는데 사용해야하고
절반은 육체적 성장을 이룩하는데, 그리고 그 절반은 육체적인 노화로 인해 
사실상 유용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매우 적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얻어내고 싶은 것이 있다면 
혹은 성취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비약적인 성장이 필요하고, 필연적으로 고통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육체와 정신은 이러한 고통을 거부하니 
대체로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잘못된 판단을 새로 보완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적어도 진보를 이루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있어서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 왔던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잘되었을 때의 가정일 뿐이고 
현실은 눈앞에 다가왔으니
어떤 시점일지는 알 수 없으나 가까운 자식 세대들은 
매우 고통스러운 시대를 지내야함에는 틀림 없다.

물론 이 굴레는 부모님 세대로 부터 시작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나
이 굴레를 끊어내지 못하고 더 큰 굴레를 만들고 만 것임에는 틀림 없을 것 이다.

이 영향은 이미 사회에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큰 영향을 주게 될 것 이다.

이미 카운트 다운은 10년전에 시작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능하다면 
이런 죄업의 굴레를 나의 세대에서 끝내길 바란다.

결국 어린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것은 
사회에 먼저 나가 있는 사람들을 보고 배우는 것이며
직접 광활한 세계를 맛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이 세상의 전부일테니 말이다.

끊어내지 않는다면 닳아 없어질 때 까지 고통 받을 뿐이다.

따라서 나의 세대는 가능한 이 굴레를 끊어냈으면 한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로 하지만 
내 주위를 바꾸는 것은 비교적 나의 에너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꾸지 못하더라도 영향력은 충분히 행사할 수 있을 것 이다.

탁월함과 훌륭함은 누구나 본 받고 싶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향을 주기 힘들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따르는 부하나 서로 신뢰하고 친구, 그리고 나의 가족 만큼은 
이 굴레에서 끊어 낸다면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될 것 이다.

어쩌면 영향력을 받은 그들 스스로가 굴레에서 벗어나 
탁월함과 훌륭함을 갖추고 
그 주위 사람들도 그들을 보고 영향을 받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선 순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그리 되지 못 할 것이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은 없을 것 이다.

이 굴레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계에 대해 안간힘을 다해 극복하려하고 이를 성취한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니겠고 그것이야 말로 인간다움이 아니겠는가?

이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다.

아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수치심이 없는 사람들임에는 분명한데 

이들은 문제에 대해 해결하기 보다는 그대로 방치해
자신이 이득을 얻을 순간이 생긴다면 
안간힘을 다해 이득을 취하려 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에 가장 멀리 있는 부류가 있다면
그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 이다.

그들의 말을 귀를 기울일 필요는 전혀 없다.

이러한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이 늘면 늘 수록
이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며
도덕적 해이가 침식되고 충분히 사회가 침식되면 
이제는 어쩌할 도리가 없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도 신봉하는 법 조차 말이다.

수치심이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못하겠는가?
법의 예외를 파고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의 현실이 이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법에 모든 예외를 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를 시도하려는 순간 
사회 구성원들은 자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하며,
충분한 논의를 거쳐 결정했다하더라도 
충분한 데이터가 쌓여야만 한다.

사실상 짧은 시간내에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아니면 또 다른 사람들의 말 처럼 
세상의 도와 덕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까?

그들이 찬가하는 도와 덕은 생존 본능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질 뿐더러 
이를 극복하려면 생존 본능을 거세하기 위해
인생을 바쳐야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부분을 포함해 생각해본다면 
매우 안타깝게도 어쩌면 인간은 이러한 굴레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고통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한들 뭐 어찌하겠는가? 
그래도 지구는 돌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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