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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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Essay - Etc ] 직감(Intuition)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런 직감들을 가지려고 수 없이 노력 한다.

이런 직감을 도출하는 과정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출된 직감이 사회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런 자신의 직감을 정리해 
이념을 제시했던 수 많은 선조들 처럼 말이다.

아마 내 마음속 한켠에는 
그들 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들 처럼 되고 싶은 이유는 
내가 선조들에게 받았던 그들의 직감들은 
나의 인생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선조들 처럼
미래의 후손들에게 또는 같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각 개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원동력이 되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 블로그에 계속해서 
글을 개시하는 이유는 이런 이유가 가장 크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애초에 나는 블로그를 IT를 포함한 나의 에세이를 
공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순히 백업용 블로그로 사용할 예정이였다.

특히 에세이 쪽의 이야기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쾌할 수 있어 
그런 사람들에게 공격 당하기 쉽기 때문에 
공개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에세이를 비롯한 이 블로그의 모든 글을 
공개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듯이
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기에

이것을 되돌려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할 수 있는 한해서 사회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고찰하고 성찰해 다듬어진 
정보, 이야기들을 공개하는 것이 
그러한 것을 시작하기 위한 첫 걸음에 알맞다고 생각했다.

또한 에세이를 작성하고 이를 공개함으로써
나의 생각을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The People들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에 나의 의견을 표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직감과 직감이 연결되면서 
나를 그렇게 이끈 것이다.

물론 나의 직감이 선조들의 이념 처럼 
잘 정리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아마 나의 글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글에 직감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을 매우 잘 알 것이다.

이런 직감에 대해 정확히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없다고 해도 내가 쓰고 싶기에 쓰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은 
이 '직감(intuition)'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직감(Intuition)의 정의에 대해

그렇다면 직감이란 무엇 일까?

정말 재미있는 논제일 것이다.
아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다양한 정의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글은 나의 글이고,
이런 직감의 대한 정의 또한 나만의 직감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재미있는 논제에 대해서는 일단 제쳐두기로 하겠다.

가장 쉬운 방법은 사전을 참고 하는 것이다.

국어 사전에는 직감(直感)에 대해

"사물(事物)을 접촉(接觸)하였을 때 
설명(說明)이나 증명(證明)을 거치지 않고 
즉각으로 판단(判斷)하는 느낌"

이라 정의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옥스포드 사전을 참고 해보자.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직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the ability to know something
by using your feelings rather than considering the facts
어떤 사실(considering the facts) 보다는
자신의 느낌(feelings)을 사용해서 어떤 것을 이해하는 능력

즉,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어떤 물체(Object)에 대해 
자신의 느낌을 이용해 사물을 이해하는 것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내가 이야기하는 직감은 이와 유사하지만, 조금 다르기도 하다.

내 많은 글에서 이야기하는 직감은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직감보다
영어 문화권에서 이야기하는 직감(intuition)과 가장 유사하다.

내가 이야기하는 직관을 프로그래밍으로 설명하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 된다.

프로그래밍을 큰 틀로 보면


입력(Input)이 있고, 출력(Output)이 있는 것 뿐이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 살펴보면


입력(Input)이 있고, 출력(Output)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원하는 출력을 하기 위한 알고리즘이 있다.

모든 프로그래밍은 이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이 수 많은 알고리즘(Algorithm)이 바로 직감(Intuition)이다.

이 알고리즘의 영역은 프로그래밍 하는 
개발자가 다루어야 할 덕목과도 같다.

알고리즘의 영역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서
생산성 있는 Function, Object 더 나아가서 
Code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생산성이란 여러가지를 의미 한다.

알고리즘의 성능일 수도 있고,가독성 일 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입력과 출력이 동일한 상태에서
이러한 알고리즘은 완전히 동일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코딩 스타일 등등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요소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코딩 스타일을 보면 성격이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입력을 하고 출력을 한다는 행위는 동일하지만,
그 입력을 하고 출력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프로세스들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개발자들 마다 
같은 입력과 예상되어지는 출력이 같다 하더라도 
그 내부의 알고리즘, 
즉, 직감은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것이 바로 내가 이야기하는 직감(Intuition)이다.

직감(Intuition)에 대한 좀 더 다른 예

이제는 조금 IT의 영역에서 벗어나보자.

좀 더 멀리 나아가 
우리 전체 세계를 살펴보자.

우리는 수 많은 사회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예컨데, 우리가 가장 관심 있어하는 빈부 격차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빈부 격차는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원인으로 양적 완화, 교육 등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예로 부터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인의 요소는 Input, 
그에 대한 결과로 빈부격차를 Output으로 말이다. 

이러한 입력과 출력이 정해진 상태에서 
우리는 알고리즘을 작성해야만 한다.

즉, 빈부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솔루션을 제시해야 한다.

이에 대한 수많은 솔루션이 각 학계로부터 제시되었다.

경제적인 시각으로,
사회 복지적인 시각으로,
정치적인 시각으로 등등

수 많은 솔루션이 제시되었다.

아마 내가 눈치채지 못했던 수 많은 
시각에서 보는 솔루션들이 이미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들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으로 자신들의 직감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하나하나의 솔루션이 바로 직감이다.

IT세계에서 이야기 한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알고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밀의 자유와 직감(Intuition)


밀의 자유론을 가지고 
나의 직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밀의 자유론에서는
'부분적 진리'와 '진리'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는 직감은 '부분적 진리'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직감은 
수 많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성공
즉, 경험에 기반한 행동 방침이나 신념이 담겨있는
'자신의 철학책'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으로서 도출된 어떠한 사실들이 
'진리'일 수는 있으나 그것들은 대개 '부분적 진리'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도 
똑같은 현상이 옳바른 현상으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컨데 현대인들이 가장 관심이 있는 
자본 모으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어떤 사람은 자본을 모으려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투자하면 많은 자본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이 그렇게 해서 많은 자본을 모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세계 시장에서 주식, 채권 등과 같은 금융 상품에 투자하면 
자본을 많이 모을 수 있으며
자신이 그렇게 해서 많은 자본을 모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만약 후자가 '진리'였다면
우리는 금융 상품에 투자해서 
우리 모두가 자본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말이다.

그래야만 '진리'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금융 상품에 투자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많은 자본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이다.

전자와 후자의 방법으로 
자본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자본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진리는 아니며, 
자본을 모으기 위한 '부분적 진리' 혹은 '직감'에 불과 하다.

'진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조건에서도 
같은 결과, 결론이 나와야만 그것을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진리'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보면
인간으로서의 진리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아마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명제일 것이다.

그 누가 이 명제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것 이다.
이런 명제는 마치 우리에게 '진리'인것 처럼 들려온다.

살인은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최악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것 치고는 
지금 이 시각에도 사람들은 사람을 죽인다.

과거 역사에서는 전쟁을 통해 수 
수 많은 사람이 사람을 죽여왔다.

그리고 지금도 이 세계 어디선가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이 '진리'일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는 명제와 그러한 사실은 
진리일 수 없으며,

이는 신이 신의 모습을 한 인간을 포함한 
다른 모든 생물을 창조했고,
인간은 세계를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치우치고 
매우 인간적인 시각이 내포되어있는 오만한 생각이다.

인간만이 특별히 서로를 
절대로 죽여서는 안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딱히 없다.

물론 나는 그렇기 때문에 
서로 서로를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 중
인간만이 그러한 특별함을 부여받은 권리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조금 과격하다고 볼 수 있는 예이지만
이 세상의 절대라는 것은 흔치 않다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적절한 예라고 생각한다.

이 처럼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진리'의 탈을 쓰고
관습으로 굳어져 버린 '부분적 진리'들이 많다는 것과
이러한 것들이 비판 받는 것을 극도로 거부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위의 예를 실제 저런 주제를 토론으로 이야기 하자고 한다면
나는 다른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물리적 정신적인 철퇴를 맞게 될 것이다.

어쨋든 잡소리는 그만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이런 '부분적 진리'이 '직감'과 유사한 결정적인 이유는

어떠한 '부분적 진리'가 '진리'에 가깝거나 '진리' 일 수 있듯이
어떠한 '직감'이 '정답'이거나 '정답'에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또한 '부분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직감'들은 비판과 성찰 및 고찰을 통해 
좀 더 훌륭한 '직감'들로 다듬을 수 있다.

IT의 업계로 예를 들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어떤 한 Function이나 Object 안의
알고리즘을 개선해,
뛰어난 생산성을 지닌 function이나 Object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직감와 부분적 진리의 차이점


직감과 부분적 진리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유사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직감은 날카로운 느낌에 가깝지만
부분적 진리는 잘 다듬어진 논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직감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잘 다듬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리는 둘째 치고 '부분적 진리'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직감은 불순물이 다수 섞여있는 원석에 가까우며
부분적 진리는 대부분의 불순물이 제거된 보석이다.

예컨데,
다이아몬드, 루비와 같은 보석을 스스로 빛을 내기 위해
수 많은 가공 과정을 거치듯이

직감 또한 스스로 빛을 내는 부분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찰과 성찰, 그리고 비판이라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 하는 과정을 거쳐야 '부분적 진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찰과 성찰, 그리고 비판 과정을 거치지 않은 직감들은
절대 '진리'일 수 없으며, '부분적 진리'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나는 그런 세상에 수 많은 '부분적 진리'안에 
밀의 자유론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런 '부분적 진리' 중 에서 진리에 가까운 '부분적 진리'라고 생각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직감'들을 
마치 잘 다듬어진 '부분적 진리'나
심지어 '진리'인 것 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흔히 말하는 사기꾼들이 그러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사기꾼이 아니더라도 
사회 주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부류 이다.

그들은 자신의 직감과 경험만을 최우선시 하고
다른 사람들의 직감과 경험은 경시함과 동시에
자신의 직감에 대해서는 비판을 거부하거나
비판할 경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부류 말이다.

그들에게 비판이란 비난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거나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하면
화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여, 그것이 말에 담겨 배출 된다.

너무 자신의 직감을 너무 과신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직감을 인정하지 못하여
비판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비판 받기를 거부한 다는 것은
이는 고찰과 성찰 또한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끊임 없이 고찰을 하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스스로를 모르고,
다른 사람들을 모르며, 공동체, 사회,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는 것은 매우 소수이며
그 인간들 중 하나 인 내가 아는 것은 
매우 극 소수 이며, 
그렇기에 나의 직감이 '진리'이기에는 
너무 나도 앎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도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알고 있는 앎은 매우 극 소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너무 나도 당연하기에 비판 받지 못할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자신의 앎이 차고 넘쳐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신인류'라고 자칭해도 좋을 것 이다.

하지만 그런 신인류가 만일 
이 세계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한들 비판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이는 자유론에서 밀이 언급했듯이
'진리'를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진리'자체는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비판을 논파함으로써
그러한 것이 '진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진리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비판받는다고 한들 
진리 자체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훼손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그것이 자신이건 타인이건 간에
그리고 자신이 '신인류'라고 할지언정 

다른 사람들의 직감을 무시하거나 
비난하고 힐난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직감들을 비난하고 힐난하는 것은
수 많은 직감들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직감을 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셈이다.

이는 자신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매우 손해를 보는 행위이다.

적어도 이러한 밀의 논리가 논파 당하지 않은 이상 
세상 그 누구도 타인의 생각을 무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직감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현대 교육 시스템


놀랍게도 현대 교육 시스템은 
이런 직감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데에 탁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완전하지 않은 '부분적 진리'들을 마치 '진리'인것 처럼 이야기하고 
테스트라는 행위를 통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들 또한 대게 '부분적 진리'인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이 경직되어 있으면 경직되어 있을 수록
직감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진다.

어떠한 직감이, 어떠한 사실이 '진리'로 탈바꿈됨으로써 
비판 받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며

탈바꿈된 '진리' 찾기를 위한 테스트에 높은 점수를 받아
객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과정 속에는
직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잘못된 진리 ' 찾기 놀이와 다름 없다.

왜냐하면 정해진 짧은 시간안에 
단순히 테스트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효율적인 직감들은 몇 가지 없기 때문이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직감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그나마 나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직감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대게 좋지 못한 평가를 받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훌륭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며 
낮은 점수로서 낙인을 찍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누가 직감을 가지려 하겠는가? 

예컨데 객관적인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러한 훌륭한 점수를 받고 사회에 들어갔다고 치자.

하지만 이 사회에 짧은 시간 안에 
좋은 평가를 받기는 매우 힘들다.

대게 긴 시간이 필요하며, 혼자서는 힘들다.

심지어 테스트를 보는 것 처럼 A,B,C와 같은 점수로 측정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을 객관적인 자료로서 활용하면서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결국 누군가는 우수하고 누군가는 우수하지 않은
사람들로 분류되는데

이는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가지고 있는 
포텐셜을 버리는 매우 아까운 행위이다.

그 사람이 어떤 직감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판단하기 불가능하고
이에 더해 어떤 직감이 훌륭한지는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려우며,
훌륭한 직감을 가지는 것이 어린 시절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10대도, 20대도, 30대도 심지어 죽기 직전인 노인도
훌륭한 직감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사람은  
탈바꿈 된 '진리' 찾기 놀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줄 직감 혹은 
부분적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원한다.

테스트에서 A+ 받았다고 한들
사회에서도 똑같이 A+를 받을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ABCD와 같이 딱 떨어져서 평가를 받지도 못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A+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F일 수도 있다.

만약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이 
정말로 '진리' 찾기 놀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왜 세상은 아직도 사회적인 문제로 혼란스러워하는가?

모든 테스트에서 대부분 A를 받은 
훌륭한 사람들이 매년 그렇게 배출되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정말로 진리였다면
사회의 전반적인 큰 문제들은 진작에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왜 문명이 발달해도 사회는 아직도 
빈곤한 사람들로 넘쳐나는가?

왜 아직도 사람들은 사람을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고 있는가?

왜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차고 넘치는데 
점점 빈곤해지는 사람들은 빈곤해지고,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되는가?

대학을 나오고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수 없이 많은데 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가?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서 일까?
그렇다면 얼마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가?

하지만,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그러한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 것 이다.

그런 테스트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의 직감만이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좋은 점수를 받건 받지 않건 똑같은 인간임에는 틀림 없다.

사회에서 필요하는 사람은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감을 가지는 사람이지
탈 바꿈된 '진리'찾기 놀이를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으로서 사회가 원하는 인물과 
현대 교육 시스템에서 나오는 사람의 미스 매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 교육 시스템의 산물로서 
탈바꿈된 ' 진리' 만을 맞추는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이 배출되지만

현대 사회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직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원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창의성'있는 사람을 원한다.

나는 그러한 교육 시스템에서 자라온 산 증인이기도 하며,
이러한 교육 시스템에서 자라나는 수 많은 세대들 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교육 시스템에서 자라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다수 많은 사람들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스 매치가 일어난 상황에서 
그러한 교육에서 조차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누가 원하겠는가?

이는 교육에서 객관적인 사실로서 
테스트 점수라는 것을 사회에 제시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을 제시 할 수 있었더라면
다수의 사람들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직감을 가지는 것이 허용됨으로써
사회에 다양한 직감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에서 천재라고 이야기되어지는 
근대의 인물로 아인슈타인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스티브 잡스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익히 알고 있듯이 강사도 교수직도 얻을 수 없었고,
특허 관리청에서 일하고 있던 일개 공무원이였을 뿐이였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죽어서도 뇌가 잘게 잘라져서
연구되어졌지만 보통 사람과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스티브 잡스는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천재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며 자신이 찍은 영상에서 이야기했고,
현대 교육 시스템의 최고의 기관 대학교를 중퇴했다.

그들이 그런 업적을 이룰 수있는 것은 
그들 만의 직감이 있었고,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부딫치면서 
잘 다듬어진 '부분적 진리'로 만들어 세상에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이 세상의 패러다임이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현대 교육 시스템이 자랑하는 객관적인 테스트에서 
모두 훌륭한 점수를 받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아인슈타인은 교수가 될 수 없었던 것이고,
왜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중퇴했을까?

혹자는 말한다.

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상대성 이론을 제시한 것은
아인슈타인이였기에 가능했었던 것이고
스마트폰을 세상에 제시해 휴대용 IT기기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스티브 잡스이기에 가능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아인슈타인이 일개 공무원이였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이던 맥킨토시이건 
큰 성공을 거두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은 단지 결과물만 보고 판단할 뿐이며
수많은 포텐셜 따위는 그들이 고려할 부분 밖에 있는 것이다.

분명 그들 중 다수는 
자신만의 직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잘만 성장한다면 충분히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포텐셜을 가지고 있다.

이유야 어째됐건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현대 교육의 객관적인 평가물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하나 뻥긋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론


지금까지의 나의 논지에 동의한다면

직감은 밀이 말하는 '부분적 진리'와 매우 유사하며
정확히는 잘다듬어진 '부분적 진리'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각 개인이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즉, 흔히 말하는 생각의 본질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T업계에서는 이를 알고리즘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스스로 이러한 직감을 가지지 못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직감이 없다는 말은 
어떠한 사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과 관계를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직감이 없다면 
내가 이야기하는 '자신만의 철학책'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안에 존재하는 행동 방침, 신념 등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 대해 정확히 이해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비틀어진 시각으로 사회를 볼 수 없게 됨과 동시에
자신을 불행의 길로 다가가게 할 것 이다.

나를 모르고, 사회를 모르는데 
어떻게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내 주변 사람들이, 가족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사회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러한 직감을 생성하고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비판받고 개선하는 이 과정을 
익숙해 질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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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6 초안 및 개행 완료
2020.09.03 내용 개선 및 추가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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