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금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철학은 학문으로서 어떤 사상을 연구하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어떤 물체, 사실 등을 '왜?'라는
질문을 통해 꼬리의 꼬리를 물며, 해답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사후세계란 존재하는가'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철학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이런 것들을 정리한
나만의 '철학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철학책은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넣어놓은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들에 영향을 받을 수 는 있지만,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이런 철학책은 나의 이상을 현실에 대입해 볼때에서 나온
나의 간접적,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이며,
나의 사상, 나의 원칙, 나의 신념, 나의 꿈 등의
경험과 선험이 혼재되어 있는 하나의 내적 공간이다.
내적 공간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며,
무의식에 가까운 부분이기 때문에
교육과 훈련으로는 그럴듯 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겠지만
같은 것을 이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상황 및 환경은 모두 다를 뿐더러
시대적/사회적인 환경 또한 매우 상이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모든 것이 같다고 하더라도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으로 인해
하나의 사실/사건으로 부터 여러가지 생각들이 나올 수 있을 테니
인간의 이 내적 공간이라는 것이
정확히 일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 이다.
예컨데, 현대의 천재에 대해 다시 한번 재정의할 필요는 있겠지만
아인슈타인과 같이 흔히 이야기하는 세기의 천재들을
그 보다 과거나 지금의 현대에서 성장한다면
그가 얻었던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
과거, 미래가 아니더라도 나라는 사람을
지금과 같이 경제력이 어느 정도 나라에서
아프리카와 같은 경제력이 사실상 전무한 나라로 옮겨버린다면
지금과 같은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같은 시대라도 주어진 환경이 전혀 다르기에 그렇지는 않을 것 이다.
내가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의 사람으로서 태어났다면
지금과 같이 엔지니어나 취미로 글을 쓰기보다는
좀 더 생존에 밀접한 사냥이나 이를 위한 도구를 만드는데 시간을 보냈을테니 말이다.
물론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이냐에 대해서
본다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관점이 어떠한 사람들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라'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에 이용당하고는 하지만
이 요소들은 그러니깐
이러한 생각들과 이런 생각에서 나름 내려진 결론과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결론들이 사회에서 충분히 실험되어
개선되고 꽤나 멋들어지게 다듬어진 결론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밀이 말한 부분적 진리에 가까운 것들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이미 사회에서 부딫쳐본 결과
다듬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이전 보다는
부분적 진리에 더더욱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철학책이라는 공간들 안에
존재하고 있는 요소들을 결코 진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생각들이 잘못되어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거나
내가 가고자하는 길과 멀어졌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파기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며,
멀게는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과
가깝게는 양자역학에 대한 논쟁이라는 과학사를 살펴보면
당대 내노라 하는 사람들의 정설조차
결국에는 진리가 아니 였음을 과학사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은
더는 놀랄 일 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세대에서 한국의 일반적인 정규 교과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하버드 대학 심리학자 에드윈 보어링(Edwin Boring)의 혀 맛 지도(Tongue Map)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 것 인데,
혀에 부위에 따라 단맛, 쓴맛, 짠맛, 신맛 등을 강하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에드윈 보어링은 논문에서 부위에 따라
미세한 역치 민감도의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
감각의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 한적이 없으며,
교과서를 집필한 사람에 의해 잘못 해석되었거나
심지어 잘못된 정보를 확인 없이 그대로 반영한 것을 살펴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 또한 꽤나 의심스럽게 짝이 없다.
심지어 이것을 바탕으로 테스트를 보고
사회에서 평가를 받는 다는 것이 놀랄 따름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책에서 얻어낸 지식을 비판적인 생각을 통해
여과하지 않은 판단 뿐만아니라
고작 한 사람의 생각이나 경험에 의한 판단,
더 나아가서 그것이 미래에 선험이라 밝혀질 지라도
그것이 진리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행동이라고 보기에 충분할 것 이다.
나를 포함한 이러한 구 인류들 중에서
가장 오만한 사람들이 있다면
1세기도 안되서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현대인이
과거 선조들과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마치 현대인들이 신 인류가 된 것 처럼 말한다.
인류의 직계 조상으로 부터 도구를 사용하기 까지 수백만년이 걸렸고,
지금의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기 까지 200만년이 더 걸렸는데
구 인류의 굴레를 고작 100년도 안되서 벗어냈다는 말인가?
나에게 있어서는 우주의 창조주가 존재 한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이러한 오만함은 인간답다면 인간답다고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나의 이상의 실험 결과들은
고작 몇 십년의 경험을 통한 고찰과 성찰을 통해 나온것들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보기에는 매우 힘들며
설사 그것이 정말 진리라고 한들
나는 그것을 실제 사회에서 실험하여 검증해봐야 하며
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요소가 진리라고 알아차리기는 매우 힘들 것 이다.
이 이야기는 칸트가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
즉, "네 행위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라는 것과
일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진리는 누구던 간에 보편적인 법칙으로 적용되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진리라고 함은 현재 뿐만 아니라
그리고 저 먼 미래에도 똑같이 작용해야만 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산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진리라면
인간은 과거 뿐만 아니라 미래에 자손들 조차 산소를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한다면
이는 명쾌하게 다소 진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신 있게
진리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본다면
이 부분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 경우 완벽하게 고작 한 세기도 안되는
개인적인 경험이 진리로 탈바꿈되기 때문에
진리라는 단어의 가치가 훼손될테니 더 욱더 진리와는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내가 그렇게 경험했다고, 내 주위가 그렇다고 진리가 아니다.
한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인생 통틀어서 얼마나 있겠는가?
정말 많아봐야 고작 1만명 내외일 것이다.
그에 비해 세계 인구는 82억 명이고,
지금도 가시권에 있는 달에 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진리의 가치를 깎아 먹는 사람들의 생각이란 얼마나 오만하다는 말인가?
또한 인간의 불안정함,
즉, 자만과 기만이라는 내면의 괴물을 다루기 위해서는
어쩌면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모르는게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 따라서 나의 철학책의 많은 요소들이
진리에 다가가기란 턱없이 부족하며,
부분적 진리일지도 아닐지도 모르며
나는 대부분의 경우 진리는 아닐 것이라 판단한다.
그렇기에 이 철학책은 끊임 없이 개선될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멈추는 순간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개인의 철학책은 완성될 수 없으며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지를 언제든지 의심하며
이를 통해 성찰을 이루어야 한다.
매우 안타깝게도 동양에서는
이런 자신만의 철학책이라는 개념이 없다.
사회에서 필요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한정한다면,
자신만의 철학은 흔히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개똥 철학'으로 탈바꿈되어 꽃이 피우기도 전에 난도질을 당하며,
학벌이라는 권위에 기반한 질서 위에 겹겹히 쌓여져 있는
나이 뿐만 아니라 자본, 직책, 사회적 지위 라는 또 다른 사회적 질서에서는
이 질서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사실상 금기시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철학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러한 철학이 이 질서에 의문을 들게 하기 때문이며,
이로 부터 탄생한 개성은 이 질서에서 벗어나려하며 순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멋들어진 말을 들어보면 개성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듯 보이지만 사실 허용 되어 있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중요시 할 수는 있다.
다만, 최우선 순위인 질서와 비교한다면 개성은 한참 밀려있기 때문에
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개성 따위는 사실 고려 대상에 속하지 못 한다.
마치 질서의 중요도가 너무 거대한 바람에
개성이 가려서 보이지 않는 정도로 보이지도 않으며
순위도 매우 후 순위에 가깝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에는
틀림 없기에 어처구니 없게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에서 대외적으로는 중요시되어
마치 허용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대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이다.
사실 그것은 정말 동양권 문화에서 원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현대 패러다임 자체가 서양권 문화에 기반하고 흐르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 뿐이며
이마저도 대부분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나 이를 높히기 위해
스스로가 이러한 패러다임에 합류한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러한 척을 하고 있을 뿐,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 깊은 부분을 살펴보면 대부분 거부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동양권은 스스로의 독립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그 한계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계는 동양권 문화의 한계를 여지 없이 나타냈는데
이는 먼저 세계화에 발을 딛은 일본이 먼저 맛 보았고,
그 다음에는 한국이 한계를 다다랐으며,
이제는 중국이 그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한계에 대해
너무 빠른 발전을 이유로 들고 있으나
나는 이에 대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보고 있다.
이 절반은 동양권 문화에 깊숙히 박혀있는
무의식적인 어떠한 것(혹은 문화)에 의해 유도 당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뿌리 깊은 질서가 확립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동양권 문화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것으로 생각되는
고대 동양 철학의 영향이 크기 때문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 주제와 크게 벗어나기 때문에 더 이상 논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의 테두리는
왕과 신하 그리고 서양의 귀족들과 같은
혈연 관계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모든 내적 가치들을
현대에도 그대로 답습하는 바람에
빠르게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현대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 이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
그러니깐 크게는 국가 부터 시작해서 사회, 비지니스, 직장에 이르기까지
현대판의 왕과 신하와 같은 관계가 유지되며,
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개인의 영향이 강해져
점점 수평적인 관계가 되려하는 서양의 패러다임과
왕과 신화의 관계와 같이 매우 수직적인 관계여야하는
동양의 패러다임이 강력하게 부딪치게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서양의 패러다임이 세계의 패러다임을 지배함으로써
강력한 혼란을 야기하고 발전의 동력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초기에는 국가 발전이라는
필요에 의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거의 한계에 다다르면 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서양 사회의 시행착오에 결과물만 사용하다가 버린다.
어쩌면 이러한 시행착오가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는 그러한 멍청한 실수를 저지를리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은 농업 사회에서 빠르게 공업 사회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농업 사회의 내적 가치(혹은 그 보다 더 이전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이로서 농업 사회의 내적 가치를
그대로 가진 공업 사회가 탄생하였고,
시행 착오 없이 그 위에 쌓여지기만 했다.
그리고 고부가가치가 공업에서 정보 및 서비스 업으로
바뀔 때 또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강하게 견고하고 무너지지 않는 성,
그러니깐 질서가 탄생 하였고
이 구조는 마치 왕과 신화 그리고 백성과의 관계 처럼 짜여졌다.
이렇게 짜여져 있는 질서 하에서는
당연히 개성 따위가 들어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도로 수직적인 관계에서
개성의 허용은 곧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직적인 질서에서는
위치에 따라 권리와 역할이 존재하는데
개성은 이 권리와 역할을 거부하고 판을 깨려고 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수직적인 관계라면 더더욱
이 권리와 역할에 집착할 수 밖에 없으며
개성이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서든 배제하려고 할 것 이다.
그리고 상위 위치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합리적인 생각에 의해
이를 언제든지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극도로 수직적일 수록 상위 위치에
올라가기란 매우 힘들 수 밖에 없는데
앉을 수 있는 자리 수가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자격있는 후보자들 또한 능력의 차이는 미세하기 때문에
대게 정치적인 능력에 따라 정해지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비교적 악랄하고
냉혈적이며 나르시스트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자리 잡게 된다.
'스스로가 힘들게 노력해서 얻어낸 자리'라는 강력한 생각은
'어떠한 비열한 짓을 하더라도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물론 나르시스트적 성향이 이에 날개를 달아주기 때문에
하나의 보상 심리로서 작용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는 스스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합리적인 행동이되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직적인 질서로 가면 갈 수 록
능력과 가능성 보다는 정치적인 능력과 질서에 대한 충성도가 중요시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질서라는 판을 깰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개성을 탐탁치 않게 보는것은 당연한 것 이다.
이 자리만 수성해낸다면
어쨋든 나의 생존이 확보되는 것인데
조직이건 공동체이건 심지어 국가의 성장이 중요하다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구 인류에게 생존 본능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없다.
그것이 스스로의 목숨이건, 사회적 위치이건, 공동체의 유지건 말이다.
따라서 본래 그러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이러한 흐름에 따라 완벽하게 거세 시키려 할 테니
개인의 선택으로는 어쩌할 도리가 없을 것 이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동양권에 들어오기 전
그러니깐 농업 공동체에서는
어떤 특이한 사람이 보이면 철저히 배제된다.
삶의 목표는 해마다 잘 농작물을 수확하는데에 그쳤고
모든 삶의 체계는 이러한 목표에 맞춰져 있었을 것 이다.
농업 공동체에서는 뛰어난 사람이 필요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시대에는 농업보다 고부가가치는 없었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근성과 체력이
그리고 재배하기 위한 노동력들이 필요할 뿐
그 외에는 우선 순위가 너무나도 낮았을 것 이다.
따라서 공동체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그 특이함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 이건 배제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공동체에서는
신뢰(자본 혹은 돈)가 화폐이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한 공산품,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보가 고부가가치가 됨으로써
이런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에 맞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중요해졌으며
필요에 의해 농업 공동체에서 필요하지 않았던
개성은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사회의 질서가 수평적인 관계로 재정렬되었다.
문제는 동양권 문화에서는 특이함의 배제에 의해
질서가 재정렬되지 않았을 뿐더러
더욱 더 수직적인 관계로 발전하기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러한 완벽한 수직적인 관계가 성립되려면
완벽해야하는 왕이 그러하듯이
상급자 또한 완벽해야 한다.
그래야만 신하가 왕을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애석하게도 완벽한 인간이 없는 것 처럼
완벽한 왕 또한 존재 하지 않기에
수 많은 왕이 스스로가 완벽하게 보이기 위해
어떤 짓이던 했던 것 처럼
상급자 또한 자신의 임무를 망각한채
완벽한 상급자 처럼 보이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짓이던 할 것 이다
여기서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시작되며,
이러한 결과로서 사회의 낮은 생산성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러한 질서 속에서는 개인의 철학책은 발달할 수 없으며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할 시기에 원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또한
거의 완벽하게 거세 당하게 된다.
결국 포텐셜은 점점 사라지게 되고
한 명의 현대판 노예로 탈바꿈 되며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 처럼
모든 일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주도적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고 점점 리스크가 낮은 행위에 내몰리게 되며
결과적으로 성장을 위해 대부분의 리소스가 활용되기 보다는
어떻게든 질서를 지키기 위해 리소스가 활용되게 되며
끝내 활력을 잃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최악인 것은
다수가 이런 방식으로 채념하게 된다면
그 다음 세대도 이전 세대 수동적인 태도를 그대로 답습하게 되며
하나의 굴레를 만들어 버린 다는 것 이다.
희망적이라고 한다면
이런 개인의 철학책을 가지는 것이
여러 의미에서 효과적일 것이라는 사실 이다.
다만, 이러한 수직적인 사회 구조 안에서
개인이 스스로의 철학책을 가진다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기 때문에
많은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이는 정렬되어 있는 질서에 대한 반항이고
반 사회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싫어하는 것은 어떤 집단일까?
당연하게도 이러한 강력하게 수직적인 구조 속에서
윗 층에 속하는 집단일 것 이다.
일반적으로 기성세대라고 불리우는 그들은
이 구조를 유지 하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혹은 돈) 뿐만이 아니다.
특히 통제할 수 있는 권력과
이러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위치를 잃고 싶지 않아 할 것 인데
그래야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도로 수직적인 질서 속에서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한 수 많은 몸부림들,
즉 많은 노력을 해서 올라갔다는 사실들은 그들에게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아마, 일종에 보상심리에 가까울 것 이다.
물론 그 노력이라고 함은 음모와 공모와도 같은
정치적인 행위라는 것은 불보듯 뻔하겠지만 말이다.
어쨋든 이 또한 노력이지 않겠는가?
그들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고, 눈물을 머금은 피나는 노력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반 사회적'에 대한 기준 또한
그들이 정하기 때문에
질서에 대항하는 것을 좋게 보일리가 없다.
다만, 동양 쪽이 어찌되었던 간에 결국
전 세계가 서양의 패러다임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적 지위(흔히 돈을 많이 받는 직업)가 가지고 있는 신념을 포함한,
그것이 정말 좋은것이건, 나쁜것이건 간에
좋은 특이함으로서 자본주의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며,
이는 그 특이함에서 나오는 것을 개성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공동체에서 믿고 있는 신념의 요소와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개인의 철학책의 요소와 상반되어 부딪치더라도
그는 공동체 안에서 필요에 의해
예외로서 인정 받고 환영받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그것은 '예외'로서 인정 받은 것 뿐이지,
그가 그 공동체를 훼손하게 된다면
그는 그 공동체의 철퇴를 맞을 것이다.
사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철퇴는
비단 현대 자본주의 공동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리 내부의 다수와 다른 '이상한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퇴출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을 것 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한 현대 자본주의 공동체에서는
이런 '이상한 사람'들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판단에 대한 근거를 명확히 세우지 못한
자본주의 공동체안에서
이런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철학책을 가지고 있고,
개성으로서 이해받으려 한다고 하면
먼저 의심을 받고
그래도 이해받으려 한다면 부정 당하며
마지막에는 배제된다.
따라서 동양의 자본주의 공동체안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은 개인들의 철학책은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개똥철학'으로 탈바꿈되어 가치가 훼손된다.
이러한 치욕적인 타이틀을 가지고 싶지 않은 개인들은
스스로의 개성을 놓아버리게 되며
이를 받아드리려는 개인들 앞 길에는
매우 험난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으며
자본주의 공동체에서 끊임 없는 증명을 요구할 것 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난을
견딜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공동체와 한 몸이 되어
이러한 개성을 말살하기 위해 동참하게 될 것 이다.
공동체는 개인에게 그런 특이함을 버리라며
압박하고, 탄압하여, 배제할 것 이다.
여기서 그 특이함이
사회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건, 지니지 않건
즉, 옳건, 그르건 중요하지 않다.
공동체의 신념에 반하거나 그의 준하기 때문에
즉, 공동체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을 억압하고 탄압하여,
공동체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개인을 배제한다.
결국 여기서 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세 가지 뿐이다.
자신만의 철학책을 버리고,
즉 개성을 버리고 공동체에 흡수되어
특공 대원으로서 합류 하던가
자신만의 철학책을 버리지 않고,
공동체에게 억압받고 탄압받으며 살던가
아니면 공동체를 떠나는 방법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농업 공동체에서는 성장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해진 땅에서 정해진 양 만을 수확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 순응하는 사람이 증가하면 증가할 수록
개성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활력을 잃고
이는 성장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공동체에 순응하지 않더라도,
개성을 가진 개인은 공동체와 멀어지게 되어 활력을 잃는다.
결국 공동체로서 신념은
그것이 옳바르건, 올바르지 않건
이에 따르는 구성원들에 의해 지켜지게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을 것 이며,
그렇다는 것은 공동체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제한되어 있는 리소스의 대부분을
소모할 준비 또한 되어 있다는 것 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이 소모되는 리소스는 증가될 것 이고
한계에 다다르면 공동체는 와홰될 것 이다.
아마 동양의 세 마리 용(중국,한국,일본)은
모두 이런 자본주의 공동체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동양의 자본주의 공동체는 발전 단계에서는
서양의 자본주의 공동체의 에너지 보다 높아
비교적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지만
이런 에너지는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서서히 소모되어
0에 가까워지면 사회의 활력을 잃는다.
마치 엔트로피와도 같다.
패러다임에 올라탈 수 없다면 계속해서 엔트로피가 쌓이게 된다.
왜냐하면,
개인들이 철학책을 가자지 못하고,
배제된 사회는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계화가 이루어지기 전 이라면
딱히 성장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 이다.
하지만, 세계화에 의해 성장하지 않는다면
뒤쳐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의 사고의 틀을 깨야 할때,
그런 유연하지 못한 것이 성장을 방해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틀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구성원들이 많은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며
패러다임이 변했을 때는
이 틀을 깨고 공동체 내부의 질서를 새로 정립해야 한다.
먼저 일본이 개방을 통해 엄청난 발전을 맛보았으나 한계가 보였다.
그 후에 한국이 개방을 통해 엄청난 발전을 맛보았으나 한계가 보인다.
다음으로 중국이 개방을 통해 엄청난 발전을 맛보았으나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서양의 자본주의 공동체는 성장하고 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특히 유럽은 일부 나라만을 제외하면,
경제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는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에 가입해있는 국부가 많거나,
성장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
유럽연합이라는 이름 하에 그들을 지켜주고 있지만,
영국의 브렉시트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유럽 연합의 유대관계도 약화되고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지에 어떠한 사람들은
서양의 자본주의 공동체도 상황이 썩 좋다고 볼 수 없으니
동양의 자본주의 공동체의 지금도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공동체가 성장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말대로 정말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장하고 싶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다.
이런 자유를 주장한 밀은 영국에서 태어났고,
그의 자유론도 영국에서 처음 세상에 나타났지만
결국 그의 자유라는
이념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고
실천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뿐인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각 개인들이 철학책을 모두 가져야 한다거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의 자본주의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진
밀의 자유에 의해 이런 철학책을 가진 개인들이
탄압받고 억압받을지는 모르겠지만 배제되지는 않는다.
미국에서는 이런 개성에 의해 어떠한 사회 문제로서 나타난다.
물론 어떠한 사람들은 이런 사회 문제를 보고
더 쉬운 방법이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질타하고는 한다.
따라서 이런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유연성을 주었으며,
그 만큼 나라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나는 세계 모든 개인들이 철학책을
가져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책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철학책을 받아들여도 큰 문제는 없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철학책을 무시하고, 개성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더 이상 발전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그런 사회에서 더 이상 발전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할말이 없다.
하지만 사회가 혹은 사회 구성원들이
더 이상 발전을 원하는데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의 개성을 무시하고 탄압하고 배제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사회는 원하는 발전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계속 변하고,
그에따라 흐름이라는 큰 파도가 오며
사회는 그 큰 파도에 타기 위해
무엇보다 유연함이 필요한데
그런 사회는 그런 파도에 타려해도 유연하지 못해
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파도에 올라타지 않으면서,
사회에 성장을 바라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