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항상 작던 크던
리스크를 지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의 사회를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이 좋으냐며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런 '리스크'를 이야기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를 하나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 '리스크'에 따라 사회에서의 몫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초에 인간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 자체는
이러한 '리스크'에 종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이런 사회의 '리스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리스크에 대한 정의
그렇다면 늘 하던대로
리스크에 대한 정의를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선 국어 사전에서의 리스크를 먼저 살펴보자.
이 리스크를 적절하게 한자어로 변환하면
위험도 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 생각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위험성은
'위험하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성질'
이라 정의내리고 있다.
나에게는 이 정의가 와닿지는 않는다.
물론 영어에서 온 단어이기 때문에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영 사전에서 찾아보자.
옥스포드 영영사전에서 이 리스크에 대한 정의로
'If something that you do is a risk,
it might have unpleasant or undesirable results.'
라는 예문이 있는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리스크는 이 예문의 리스크와 유사하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리스크는
썩 유쾌하지 않거나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그에 비례하여 높은 가치를 얻을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high risk, high return 말하는 것이다.
리스크와 자본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라고 누군가에게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돈, 부동산, 채권 등을 포함한
'자본'이라 이야기 할 것이다.
나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현대 자본주의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자본은 너무나도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최소한의 자본이 없다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해결 할 수 없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게 된다.
나라간에는 협상 보다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사회 안에서는 비판이 아닌 비방과 욕설이
그리고 그런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과 개인에 사이에서는
물건을 나누기보다는 물건을 훔치는
상황이 난무하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아무리 훌륭한
어떤 이념이 자리잡고 있다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현대인이 믿고있는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이런 자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이런 자본도 일부 포함되지만
그것이 주된 내용은 아니다.
나는 이런 자본 중에서
'인간 자본(Humon Capital)'을 끼워놓고 생각하는 편이다.
왜냐면 나는 회사가 끊임 없이 성장하면서
그것이 주가로 나타나는 것 처럼
인간 또한 끊임 없이 성장할 수 있는 자본으로
때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자본은 주가 처럼
명확하게 나타나는 자본은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나의 논지가 굉장히 불편할 수 도 있겠지만
나는 비열한 어른들 처럼 사람을
필요할 때 처럼 쓰고 버리는 그런 논리에서의
'인간 자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주로 자신)의 능력을 자본으로 놨을 때의
인간 자본을 말한다.
이는 대개 주관적인 성향이 강하다.
왜냐하면 다른 누군가가 개인의 생활을 24시간 지켜보고
개인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 자본에 대한 포텐셜은
대개 자신의 자아만이 알고 있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이런
인간 자본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런 투자들 중 가운데 가장 옳은 투자는
'이방인'이 되는것이라고 생각 한다.
이방인이 되는 것은 리스크가 엄청 크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까지 만들었던
부모 부터 시작해 친구, 휴식처, 편의점 등의
모든 안정된 인프라를 포기해야 하며
외국에 가서 다시 이런 인프라를 구축해야하고,
이에 새로운 언어를 끊임없이 공부해야함과 동시에
외국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취업한 외국 회사에서 기대하는 요구치에도 응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에 어느정도 대처할 수 있으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가치들은 너무나도 크다.
외적으로는 능숙한 외국어, 외국인 친구, 급여를
내적으로는 다른 문화,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사람들을 이해함으로써 나타나는 수 많은 깨달음 등
글로서 적을 수 없는
수 많은 리턴이 나에게 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적절하게 고찰되고 성찰되어
'나만의 철학책'에 흡수 된다면
나는 이것으로써 나의 개성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개성으로서 창의성에 가까운 어떤 것을 얻게 됨에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이 되는 것을 포기한다면
이러한 인프라를 유지할 수 있고
수 많은 리스크를 지니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내가 얻을 수 있는
수 많은 외적, 내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리스크를 지지않는 만큼
나에게 올 수 있는 리턴은 적어질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리스크를 지어가면서
나는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했고
그런 외적, 내적인 리턴들이 나에게 왔다.
또한 앞으로 수 많은 리턴들이 나에게 올 것임에
나는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리턴은
내가 많은 리스크를 지었기 때문에
그 몫을 당연히 내가 가져간 것 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 해보자.
어떤 사람이 어떤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가서
연봉 2000을 받았다.
그는 1년 동안 시간과 돈을 써가며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 능력을 증명한 결과 4000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돈과 시간을 투자함으로써
200%의 수익률을 거둔셈이다.
그는 가만히 있었다면 시간과 돈을 손해볼 수 있다는
리스크를 지고 그의 몫을 받은 것 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능력을 증명함에 실패했다면
그는 그만큼의 시간과 돈의 리스크를 받게 되는 것 이다.
이럴 경우 오히려 가만히 있는 쪽이
투자적 관점에서는 이득이라는 것이다.
금융 상품의 경우 안전한 상품은 3~5% 정도에
아무리 훌륭한 상품이라고 해도 10%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라는 인간 자본에 투자할 경우
200%의 수익률을 거둔 셈이다.
물론 이런 예에 대해
연봉이 2배나 뛰는 경우가 그렇게 쉽냐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IT업계에서는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연봉이 2배 뛰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IT업계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그 분야에 능력을 증명할 수 있다면
2배건 3배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는 사회에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알게모르게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리스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만큼 그들의 몫을 가져가고 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굳이 자신이 사회에 얼마나
유용한지에 대해 떠들고 다닐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이이기하면
굳이 연봉이 높다면 나의 연봉이 높다고
주위에 떠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얼마나 리스크를 지고 있는가?
이런 리스크를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
사회에서 많은 몫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투자자들이나 사업가들이 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많은 리스크를 지고 자신의 '자아 성찰'을 위해
싸우고 있는 어떤 사람들이 되기도 한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커 주커버그, 엘론 머스크와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투자자나 일반적인 사업가들과는 매우 다르다.
투자자나 일반적인 사업가들은
자신의 자본을 늘리기위해 행동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아 성찰'을 위해
자본을 끌어들이고, 계속해서 이용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람들은
이런 '자아 성찰'을 이루려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러한 큰 리스크를 지고 있는 한
그들이 가지는 자본의 양이 많아야 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적어도 나는 그들이 사회에서 지고 있는 리스크를 생각한다면
훌륭한 음악을 들었거나 연설을 들었을 때
말보다는 관객 모두가 기립박수를 치듯이
그들의 리스크를 생각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리에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 것 밖에 할수 없을 것이다.
그 감정을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의 경우 자본은 금융 자본일 것이고
사업가들이 필요한 경우는 금융 자본도 필요하겠지만
인간 자본 또한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얼마나 리스크를 지고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리스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이 지고있는 리스크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몫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런 리스크를 지지 않으면서,
자신이 사회에 큰 몫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말이다.
자본이건 인간 자본이건
시간이던 돈이던 자본이던
리스크를 지고 살아가지 않으면서
온갖 변명을 하면서 불평하는 사람들 말이다.
대개 그들은 자신이 리스크를 지려고하기 보다는
크게는 세계와 나라를
작게는 사업가, 자본가들을 마치 악마처럼 생각하며 공격 한다.
이 세계는 그리고 사회는
정확히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사실로서 사업가나 자본가들을
악의 무리로 규정해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는 것은
안된다는 사실을 그러한 사람들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머리속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그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욕설을 퍼붓는다는 것 이다.
내가 인터넷에서 그런 사람들과 대화했을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세상 살기 힘들어서 그랬다'와 같은 변명 뿐이였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리스크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과연 그들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떤 리스크를 지고 있었을까?
내 짧은 인생에서 적어도
그러한 말을 입으로 내뱉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리스크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의 사회에서의 몫이 적은 결정적인 이유는
스스로 리스크를 지려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
나의 논지에 동의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회에서 나의 몫은 내가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하고 말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런 결론으로 부터
그렇다면 '사회에 살아간다는 것은 도박이겠네'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런 리스크를 계산할 때
확률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확률에 의해
리스크를 지는 행위를 마치
도박과 같은 것 처럼 판단한다.
하지만 도박과 사회에서 리스크를 지는 것은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도박은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사회에서 리스크를 지는 것에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는 복잡하기 때문에
작게는 공동체, 국가 크게는 세계까지
사회에 개입을 하지만,
이런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게 존재하며
자신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 그러한 확률 또한 올라갈 수 있다.
흔히들 선택을 해야할 때
우리는 갈림길을 머리에 떠올린다.
그런 연상법이 마치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끝이 이미 정해져 있는 갈림길 처럼
마치 인생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처럼
운명 결정론에 따라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을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선택하는 것은 갈림길이 아니다.
갈림길에 선택함에 따라 도착지는 정해져있지만
인생의 갈림길에는 도착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 갈림길에 도착지가 정해져있다는 사람들은
돛자리 피고 점을 보는 일을 하거나
주식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의 갈림길에 도착지가 정해져 있을리가 없다.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은 이상 말이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내 인생이 어떤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과 같이 운명이 있었다기 보다는
어떤 선택을 했다는 사실 보다
내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었다.
즉,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수 많은 선택지는
어떤 선택지를 결정하는데에 고민하는 것 보다
일단 선택지를 고른 다음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좀 더 좋은 길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였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은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지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컨데, 자신이 사회에서 많은 리스크를 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더 많은 몫을 가지고 싶다면, 리스크의 총량을 늘려야 한다.
그런 리스크를 지게 될지
아니면 지지 않고 그에 대한 몫을 받게 될지는
스스로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따라 달렸다.
하지만 그러한 리스크의 총량이 한없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많은 몫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코 옳지 못하다.
이는 공정하지 못하다.
그 몫은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리스크를 지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