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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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Essay - Human, Technology ] 올바른 것이란 무엇인가? - 양자 세계관, 뉴럴 네트워크 및 머신 러닝



올바른 것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과연 어떤 기저에서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 일까?

나는 이런 것이 항상 궁금하다.

실제로 가끔 이에 대해 
상대방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는데

경험상 대개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한 그에 대한 기저에는
매우 주관적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직감이 있었다.

즉,
기저가 매우 신뢰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정말로 올바른지에 대해서는 믿기 어려웠다.

예컨데, 
현대에 들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저로서
통계가 사용되고 있는데,
통계의 결과물만 보고 
어떤 사항에 대해 올바름을 주장한다.

하지만, 통계는 결과물 뿐만 아니라
어떤 조건 하에서 결과물을 도출했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표본의 수가 적절한지, 표본 편향은 없는지,
발표한 기관이 신뢰성이 있는 기관 인지 등을 고려해
정말 이 통계가 신뢰 가능한지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결과물과 
기관에 대한 사항만 보여줄 뿐
그 외에 사항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지 않는다.

만약 표본 자체의 문제가 있다면
애초에 전제부터 틀렸기 때문에 
그것이 정말로 올바르다고 이야기 하기는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하거나
어떤 사항에 대해 올바름을 이야기할 때,

자신만만하게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기저에는
매우 주관적인 다듬어지지 않은 직감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직감이 아닌
뉴스와 같은 매체나 검증되지 않는 글이나 이야기에 
기저를 두고 자신의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세계에 꽤 나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저들에 대해 
쉽게 말하면,
소문이나 루머와 같은 가쉽에 매우 의존한다.

소문이나 루머에 의해 공동체를 떠나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연예인와 같은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 경우 
이런 소문과 루머에 기저를 두고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한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은 것 처럼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꽤나 재미있는 현상이지 않은가?

자신이 내뱉었지만,
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그리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는 
인간의 비열함이 매우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 생각 한다.

그렇다면 이런 올바름에 대해 정의를 내려볼 수 있을까? 

오늘은 이런 올바른 것에 대해 파헤치고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올바름에 대한 정의


그렇다면 늘 하던대로 
올바름에 대한 정의를 이야기를 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옳을 것 이다.

왜냐하면 단어에 대해 정확히 정의를 내리지 않고
이야기를 하면 나와 상대의 이야기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간의 대화에서 
어떠한 유용함도 느낄 수 없을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기 앞서서
주제에 대한 핵심적인 용어나 단어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은 
매우 '올바른' 행위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사전을 참고 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올바르다'라는 용어의 개념은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고 옳고 바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표준국어사전 이외에도 옥스포드 영영사전의 정의도 확인해보자.

올바름을 직역하면 rightness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개념은 아래와 같다.


​1 ・the quality of being morally good or acceptable 
   도덕적으로 훌륭하거나 용인되는 자질 

 ・the rightness (= justice) of their cause
    사람들(their)의 대의에 대한 정당성(= 정의)
2 ・the quality of being correct for a particular situation or thing, or 
  for a particular person
   특정 상황이나 사물 또는 특정 사람에 대해 올바른 품질
 ・the rightness of his decision
    사람들(his) 결정의 정당성

나는 어떤 개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국어 사전보다는 영영사전을 참고하는 것을 좋아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좋은 직감을 주는 것은
대개 영영사전의 개념이였고

위에 올바르다에 대한 개념에 대해 
국어사전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치나 규범과 같이 애매모호한 단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올바르다에 대해 이치는 그렇다쳐도
'규범에 벗어남이 없다'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한국 사회가 규칙과 규범을 중시하는지에 대한
그리고 얼마나 공동체를 중요시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정의를 사용하지 않고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기반으로 정의를 내리려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올바름에 대해서는 
사람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혹은 사회에서 허용하는 범위 내의 
훌륭한 자질과 품성이 보일 경우'
올바른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며,

특정 상황에 대한
그리고 사람들(his, thier)의 경우에는 
'대의에 대한, 결정에 대한 정당성'에 대해 
올바른 사람들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한 개인에 대해서는 '도덕'과 
'사회에서 허용되는' 자질과 품성
이른바 키케로의 의무론에서 나오는 개념인 
'데코롬'의 요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올바르다를 '데코롬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로마 제국에서 올바르다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데코롬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런 데코롬에 대한 요소들은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현대인들에게도 대개 올바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경우, 사회나 국가의 '정당성'에 대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로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올바름의 분류에 대해


이러한 정의로서 올바름과 
그에 반하는 올바르지 않음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올바름의 요소들
그러니깐 이런 올바름의 집합체인 '데코롬'에 대해

무엇이 데코롬하고 데코롬하지 않은가에 대한 판단은 
매우 애매모호하다는 것 이다.

특히 개인은 둘째치더라도 
공동체의 경우 자신의 올바름을 이야기할 때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데코롬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것은
한 사람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어떤 공동체의
더 나아가 사회의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개인에 대한 도덕적 자질과 같은
데코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
대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말해 경계가 무너져있으면 
정당하지 않은 것이 마치 정당한 것 처럼 
궤변을 늘어세우면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적절치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판단 기준이 필요 하다.

하지만, 선조들에 의해 그러한 판단 기준에 대한은 것은 
사실상 계승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주제에 대해 
각자의 직감을 이야기 해볼 필요가 있고,
직감을 이야기하며 '부분적 진리'로 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이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는 '그런게 밥먹여 주냐?'라는 이야기에 의해 
유용성이 완전히 무너저 내리기 때문이다.

틀린말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돈 한 푼도 벌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인 논의는
직접적으로 당장 우리에게  돈 한푼 건내주지 않지만
우리를 근본적으로 진보하는데에 매우 유용하다.

사회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진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가
우리에게 돈 한푼 정도가 아니라 
산더미 만큼의 돈을 건네줄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철학적 논의가 
돈 한 푼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철학적 논의를 통해 
내린 결론으로서 사회의 유용함을 증명할 수 있다면
산더미 만큼의 돈이 굴러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다에 대해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사실 올바르다와 올바르지 않다의 
경계선을 긋는것은 매우 힘들다.

또한 나 혼자서 이런 분류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결론을 내리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분류 방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그렇다 나의 주장에 대한 '올바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 것 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양자론'에 관한 이야기를 이에 대입한다면 
조금 이야기가 편할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현재 양자 역학에 대해 이야기 될때 설명되는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에 대한 이야기 이다.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관찰 했던 어떤 물체가 그곳에 있다고 보기 힘들며,
이는 결국 확률로서 인식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런 양자 세계관에 따르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수학적으로 확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올바름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공동체나 사회에서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에 대한 분류 방법으로서
확률로서 이를 인식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즉, 그것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는
확률에 의해 양자 상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위의 사진과 같이 A, B, C, D, E라는 
5명의 사람이 각각 자신의 올바름에 대해 주장하고 있으며,
이 중 단 하나가 올바르다고 가정 해보자.

그렇다면 각자 자신이 
왜 올바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각 올바름에 대해서 
이것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양자의 세계의 눈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세계의 눈으로 본 확률 상태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각 올바름은 현실 세계(Real World)에 영향을 받고 있는
양자의 세계(Quantum World)에 의해 확률이 계산되어 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세계 또한 
양자 상태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 세계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판단인 
현실 세계의 올바름(Rightness)라는 것도 
확률로서 양자 상태에서 존재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정말로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 가에 대한 판단은
더욱 더 혼돈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양자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인간의 시각으로는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다.

단지 확률적으로 이것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양자 세계관과 뉴럴 네트워크


이런 올바름에 대한 양자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빨간색 박스와 같이 실제 현실의 각 입력들이 
현실 세계의 영향을 받는 양자 세계에 들어 갈때의
출력을 도출해내는 양자 세계관안의 알고리즘이 가장 중요할 것 이다.

매우 재미있게도 이미 이에 대한 하나의 솔루션이 
2020년 현실 기준으로 이미 제시되어 있다.

바로 뉴럴 네트워크이다.

현재 많이 이야기 되어지는 딥 러닝의 뿌리로써
강 인공지능의 솔루션으로서 20세기 중반에 제시되어졌지만,
강 인공지능의 개발 연구가 
지지부진하자 투자가 점점 투자가 줄어들면서 잊혀진 기술인데

구글 알파고 팀에서 세기의 바둑 쇼를 벌이면서 
다시 한번 빛을 발휘하게 된 기술이다.

뉴럴 네트워크는 인간의 뉴런을 모방해 
이를 수학적으로 모델을 정의한 모델이다.


대충 위와 같은 모델로 그려지는데 



이 뉴럴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기계가 
바로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배우는 기계인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이다.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는 
이번 주제와는 벗어나기 때문에 자세히 이야기 하지는 않겠다.

시간이 있다면 
전지적 개발자 시점 태그로 따로 글을 작성하도록 하겠다.

뉴럴 네트워크를 기반인 머신 러닝은  
수 많은 데이터들을 학습(Learning)하게 되는데 
데이터가 충분하다는 가정하에 

입력을 넣었을 때,
이 것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을 내려 준다.

예컨데, 어떤 사람이 암인지 
암이 아닌지를 판단하고 싶어한다고 가정해보자.

암에 대한 잘 클렌징된 데이터가 존재하고
입력으로써 생활 패턴, 흡연 여부 등등의 여러가지 요소를 넣어주면

이 사람이 암에 걸렸는지 걸리지 않았는지를 
데이터에 기반해 확률적으로 표현해준다.

데이터가 많으면 많을 수록 
머신 러닝의 판단은 더욱더 정확해 진다.


따라서 머신 러닝은 판단의 매개체로서 
이런 양자 상태를 계산해주는 솔루션으로서 활용할 수 있다.

머신 러닝은 믿을 수 있는가?


머신 러닝은 하나의 도구로서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매우 유용한 기계임에 대해서는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분적이지만,
지금에도 훌륭히 활용하고 있고 
연구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하더라도 
머신 러닝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남아 있다.

첫째, 정말로 잘 클렌징되어있는 믿을 만한 데이터인가?


머신 러닝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 데이터가 정말로 중요하다.

예컨데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결과를 비틀기 위해서
이 데이터를 조작해서 머신러닝에 학습시키면
이는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책임 소재는 누구에게 있는가?


양자의 세계관에서는 
그럴 확률과 그렇지 않을 확률이 존재한다.

예컨데, 올바를 확률이 99%이며,
올바르지 않을 확률이 단 1%라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번의 경우에는 올바르지 않았다.

이럴 경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판단은 기계에서 내렸기에 머신 러닝에 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재판에 머신 러닝을 내세울 것인가?
말 도 못하는 기계를 말인가?

정말 재미있는 상황이다.

정말로 강인공지능이 현실화 된다면
기계를 재판에 내세우는 경우가 나올지도 모른다.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아니면 머신 러닝을 만든 회사인가?
그럴 경우 만든 회사에게 있는가?
아니면 클렌징한 사람에게 있는가?

그렇다면 각 어느 정도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현실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자율 주행 자동차' 일 것이다.

이에 대해 데이터가 충분해 
올바른 확률이 99.99%며, 
올바르지 않을 확률이 0.01%라고 해보자.

하지만 매우 불운하게도 0.01%로 사고가 나버렸다.

이럴 경우 누구에게 책임 소재가 있는가?

데이터가 더욱더 충분해 
0.001%던 0.0001%던 사고가 일어날 확률을 줄였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는 것 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치 일어나지 않을 것 처럼 
확률을 낮추어 감출수는 있어도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출 수 없다.

예컨데 몇년전 미국 대선에서
모두가 힐러리가 당선될 것이라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트럼프가 당선되어버렸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사망률로, 그리고 
사망 비율이 노년층이 많다는 이유로 
세계의 The People들이 리스크를 무시하자
전 세계는 아직까지 고통 받고 있다.

리스크를 무시할 수는 있어도
리스크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리스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이처럼 처참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가?


이런 양자 상태에서는 무엇이 올바를까?

인간의 눈으로는  
확률에 의해 이것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히 어떤 것이 올바른지 알 수 없을 것 이다.

이는 머신 러닝을 현실에 활용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양자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A, B, C, D, E에 대해 
무엇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해
올바르지 않을 확률이 존재하는 이상,

양자 세계관에 벗어날 수 없는 이상
분류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것 이다.

그것이 0.0001%라도 말이다.
이보다 더 작은 값이라도 벗어 날 수 없다.

분류 자체를 할 수 없으니
각 올바름의 정당성 또한 약해질 수 밖에 없으며
더욱더 혼돈에 빠지게 될 것임에는 틀림 없다.

이러한 세계관 안에서는 A, B, C, D, E를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 인가에 대해서는 관계 없다.

즉, 대통령이건 학자이건
나이가 많건 적건 
사회적 지위가 낮건 높건간에 
인간의 올바름이 양자 상태에서 존재하는 이상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는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판단은
각 개인의 역할이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이는 머신 러닝을 활용하더라도 마찬 가지이다.

모든 올바름은 양자 상태에서 
확률 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양자의 세계에서는 
자신 또한 이에 포함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올바름 또한 
이러한 양자 상태에 있음에 대해서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결론


결국 우리는 어떤 것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해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는 끈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 사회가 고정되어 있었다면
예지가 가능할 것 이다.

하지만,
19세기의 올바름이 
20세기에 올바름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움직이는 사회를 
우리가 인간인 이상 예측할 수는 있어도 예지할 수는 없다.

또한 과학이 계속해서 빠르게 발달하면서
우리의 현실 세계 또한 빠르게 발달함에 따라
무엇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한
주기 또한 짧아지고 있다.

세계에서 스마트폰을 다룰줄 아는 것이 
현재에 들어서는 하나의 올바름으로서 생각되어지지만

불과 10년전만 해도 하나의 올바름은 아니였다. 

우리들의 현실 세계가 빠르게 바뀌어가면서
올바름의 주기도 그에 비례해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물질적인 세계 뿐만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올바름의 주기도 짧아지게 된다는 것 이다.

이는 세대를 좀 더 세분화하게 하여
사회에 세대 갈등을 야기 한다.

예컨데,
과거의 예절이였던 것이 한 세기 지나 예절이 아니게 된것이
현대에 들어서는 한 세기는 커녕 10년 주기로 바뀔 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더 짧을 수도 있다는 것 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세대를 2030, 4050으로 나누었지만 
이제는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로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20대의 입장, 30대의 입장, 
40대의 입장, 50대의 올바름이 달라지면서 
과거 보다 더 많은 사회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런 올바름에 대한 양자의 세계관에서는
나의 이러한 논지 또한 양자 상태에서 존재할 것 이다. 

하지만, 이런 양자의 세계관에서는 
반대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슬프게 하기도 한다.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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