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들어 한국 사회는 엔트로피가
너무나도 쌓여있어 한계에 도달한듯 보인다.
최근에 들어 나타난 남녀갈등을 포함해
과거 부터 있어왔고 아직 해소되어 있지 않은
정치적 지역갈등,
사회가 더욱더 빠르게 변하면서 생기는
세대 갈등 등 사회 전반적으로 엔트로피가
터질듯이 쌓여있어 불안해 보인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 살지도 않은 놈이
한국 사회를 논하냐며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집안에 불쾌한 냄새는
집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코가 마비되어서 눈치채지 못하지만,
밖에 있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올때
집안의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에 대해 눈치챌수 있듯이
한 국가에만 살고 있으면 그러한
불쾌한 냄새를 눈치채기는 힘들 것이며
눈채채더라도 불쾌한 냄새를 다른 국가에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감추려할 것 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국가가 이러한 대처를 한다면
외교적인 면으로 보면 당연한 행동이다.
굳이 다른 나라들에게 좋지 않은 패를 보여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부에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그리고 스스로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The People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 이다.
각 개인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The People이라면 각자의 생각 혹은 직감을 가질 필요가 있고
이를 가지고 탁상에 앉아 좀 더 진리에 가까운
'부분적 진리'로 갈고 닦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
그리고 살았던 사회에서는 The People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이는 민주주의의 한계이기 보다는
이를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니면,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대략 2000년 동안의 인류에게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받아드리기에는 아직 시기 상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항상 '어쩔 수 없다', '그게 현실이다'라고
이야기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버린
비열한 인간들을 제외하더라도,
그 외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The People들에게는
각자의 직감과 자신의 철학책을 들고,
탁상에 앉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야기라는 것은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각 개인의 관점과
이를 기반으로한 직감을 말하는 것 이다.
하지만 인생을 정치로 생각하는
그리고 자신의 편이 아니면 적이며,
이에 더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직감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비난과 힐난을 하며 이야기 하기를 거부 할 것이다.
한국 사회였다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나이를 들먹이며,
내 멱살을 잡을 것이다.
아니면 나의 사회적 지위나 나이로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말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니가 아는 게 뭔대'라는 식으로
나의 직감에 대한 비판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어 보이는 것들 중 약한점을 찌르면서
더 말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입을 막으려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할말은 없다.
어처피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려하지도,
나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도 않으려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엔트로피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증거
이런 엔트로피가 터질듯이 쌓여있다는 증거로서
세계 어디에서 볼 수 없는
급속도로 낮아지는 출산율을 제시하고 싶다.
왜냐하면 출산률의 하락은
미래의 국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편한 사실일 이다.
국가 입장에서는 국민의 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이는 세수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가 운영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국가 운영에는
큰 차질이 생길 것 이라는 것은
어린 꼬마 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인구가 줄어 든다는 것은
전체 소비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경제에도 썩 좋은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구의 하락은
곧 총 소비의 하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총소비의 하락은 국내 모든 회사들의
전체적인 매출의 하락을 야기할 것이고
그로 인한 고용 하락,
그리고 임금 동결 등의 문제는
그 국내에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는
썩 달가운 소식은 아닐 것이다.
이 것이 출산율이 낮아질때 미래에 생기는
너무나도 예측하기 쉬운 자명한 사실이다.
국가 입장에서도, 국내 회사 입장에서도,
그리고 국민 입장에서도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시행해왔던
케인즈의 이론대로 총 소비를 늘리기 위해
정부의 지출을 늘리는 것도 한계가 있으며
총 인구가 줄어들면 걷을 수 있는 세금도 줄어들어
현재보다 더욱 국가 운영의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한국에게 있어서는 올지도 모르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예정되어있는 미래이다.
이에 더해 한국의 자살률은
2003년 부터 2018년도 까지를 봤을 때,
2017년 2위를 제외하고는
OECD 순위의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지를 보면
사회의 엔트로피가 다른 국가와 비교해봤을 때
얼마나 쌓여있는 지는 이미 증명된 바와 다름 없다.
그러한 미래가 이미 지표로서
한국 사회에 끊임 없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왜 한국 사회의 엔트로피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가?
한국에서 엔트로피가 한계까지 이르르게 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큰 원인이 될 수있는 것들을 꼽아보자면
경제적으로는
나라의 자본이 대기업에 집중되어
대기업에 일하지 않으면 제대로된 분배를
받을 수 없음으로써 나타나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양극화와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한 과열된 경쟁,
부동산에 자본이 집중되어
과열된 부동산 시장이 야기하는 높은 가격의 부동산
사회적으로는
전반적인 문화에 수직적인 군대 문화,
나이로 서열이 결정되는 나이 문화가 섞임으로써
일상 생활, 조직 또는 회사 내부에서 나타나는 구성원들간의 갈등
그리고 최근에 부각되어지는
극단적인 세력에 의해 시행되어지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
마지막으로 오직 '대학 입학'만을 위한 교육을 꼽고 싶다
나는 이에 대해 '어른'들의 경쟁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그런 인식에 기반해 만들어진 '교육'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잡고 있는 '경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이러한 엔트로피를
한계까지 이르르게 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경쟁'은 인간 사회에서
있을 수 밖에 없는 요소임에는 틀림 없으며
나는 이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가는 여러가지 방법 중에
'경쟁'은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경쟁은 뭔가 이상하다.
오늘과 나은 내일로 갈 수 있는 경쟁은
참여자 구성원들이 같은 조건일 가질 때만이 가능 하다.
여기서 조건이란 경쟁에 참여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조건이다.
진심으로 경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조건 하에서 하는
경쟁은 오늘과 나은 내일로 이끌지만,
경쟁하고 싶어하지 않는 참여자와
경쟁하고 싶어하는 참여자가 섞여있는 조건 하에서는
경쟁을 하고 싶어하는 참여자를 제외하고는
오늘과 나은 내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유 경쟁'이라는 것 이다.
예컨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격 경쟁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회사와 회사는 자신의 물품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가격 경쟁을 함으로써
소비자는 가격이 싸고 질 좋은 물품을 소유할 수 있다.
이런 경쟁 속에서 강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회사가 속하는 나라에서 경쟁을 하라고
강제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한국 정부에서 어떤 재화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
삼성에게 강제적으로 경쟁에 참여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한국 정부는 큰 비난을 받게 될 것임에는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경쟁에 참여하는 참여자인 회사들은
자신들의 여러가지 상황을,
경쟁을 했을때의 리스크와 이득을 고려해
경쟁에 참여하기를 스스로 원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자유라는 개념은
개인이 이 경쟁에 참여할지,
참여하지 않을 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대부분의 경쟁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정확히 말하면 경쟁이라는 인식이
후자에 가깝기 때문에
항상 경쟁에 있어서 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를 낳게 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의 진보는 매우 드물며
해가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이런 패배자가 쌓이게 되며
조금씩 사회에 두각을 나타나고, 사회 문제로 나타나는 것 이다.
결국에는 패배자가 아닌 사람의 비율보다
패배자의 비율이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높아지면서
거미줄 처럼 연결되어있는 네트워크에 의해
승리자건 패배자건 속해있지 않던간에
모두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교육'과 '경쟁'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는 '교육'에서
경쟁에 대한 인식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현대 사회에서 교육 참여자들에게
사실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정한 프로세스에 의해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거부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법에 의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즉, 초등학교 까지인가,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까지 인가
이런 강제에 의해 정해져 있는지는 나라마다 다르다.
여기 까지는 세계 모든 나라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나는 현대 교육에 대해 신뢰하지 않지만
완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교육 프로세스의 최종 목적지는
오직 대학 입학을 중점으로 두고 있다.
이에 더해 좋은 학벌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하는
좀 더 정확히는 서울 근처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반적으로 이를 '인서울'을 목표로 한다.
즉, 한국 교육의 목표는
기본적으로는 대학 입학을 중점을 두고 있지만
교육자들이 '인서울'에 들어가기 위한
'대학 입시'에 중점에 맞춰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 모든 교육이
한국과 같이 '대학 입시'에
중점에 맞춰져있다고 큰 착각을 하고 있으며
이런 색 안경을 끼고 다른 나라들의 교육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한국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이런 대학 입시에 통과한 자만이
정확히는 '인서울'한 사람만이
부모로 부터, 그리고 사회적으로 '허락'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나이가 성인의 조건에 충족 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던 간에
무엇이 되고 싶던 간에 '인서울'을 향한
'대학 입시'라는 경쟁에 무조건 참여해야만 한다.
참여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참여하지 않는다면 부모에게 그리고
주위의 학생, 선생, 다른 부모들로부터
그리고 이들이 구성하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로 부터
사회의 벗어나려고 하는 반항아, 이단아로서
차가운 비난과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만 한다.
이에 더해 동급생에게 받는
'인생을 막사는 녀석'이라는 눈초리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 어린 아이들에게
'대학 입시'라는 경쟁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며,
이에 더해 좋은 학벌을 가지기 위한
'야망' 또한 가져야만 한다.
어린 시절의 여러가지 야망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하고, 그래야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오직
'인서울' 하기 위한 야망만이 인정 받는다.
원하던 원치 않던 말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이며,
올바른 경쟁도, 올바른 교육 방식도 아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라나는 시기인
어린 시절에 오직 단 하나만의 야망만을 가져야만하고
이런 야망을 강제적으로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사회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매우 효율적이지 못한 일이다.
사회는 다양한 직감을 가진 사람들 보다
오직 획일된 방식의 사람들로 대부분 구성됨으로써,
사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며
이로서 사회의 엔트로피는 계속해서 쌓여갈 것이다.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수 많은
꿈들이, 직감들이, 야망들이
사회로 부터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당함으로써
즉,
'자아 실현'을 거부당함으로써 계속해서
개인의 엔트로피가 쌓여갈 것 이다.
만약 한국 사회에서 어떤 어린아이가
훌륭한 기술자가 되고 싶다면
좋은 학벌을 가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들로 부터 그리고
사회로 부터 이야기를 듣고 자라 오기 때문이며,
반 강제성에 의해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좋은 학벌은
최고의 가치로 취급받기 때문이며,
'좋은 학벌이 미래를 보장한다'는
이해하기 힘든 어른들의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사회의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간에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약한 어린 세대와 그런 어른들에 의해
교육받아지는 아래 세대들은
그들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매우 불행하게도
이러한 경쟁의 구성원은
그러한 경쟁에 가치를 느끼고
참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러한 경쟁에는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 한다.
경쟁의 가치는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직감을 더듬어가며 나아갈 수 있지만
경쟁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직감을 가지고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고 싶어하지 않다는 인간의 욕망이
자신만의 직감으로 다다르게 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방법'에만 목을 매달게 된다.
자신의 철학책에 기반한 '방법'이 아닌
남이 좋다는 하는 '방법' 만을 추구 하게 된다.
그 방법이 자신에게 맞건 틀리건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입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만한다면 된다.
'좋은 학벌을 가진다면 인생이 해결 된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고 말이다.
그 속에 자신만의 철학적인 생각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삶을 살고 싶어하는
매우 근본적인 철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더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고 사회를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리고
타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와 같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오직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생각만을 해야만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막상 사회에 나가면 묻는 것이
자신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묻고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를 물으며,
막 들어온 신입 사원에게 창의성을 기대 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얼마나 한국의 교육이 비틀어져 있는지는
사회에 처음 진입하게 되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경쟁의 가장 큰 문제점은 타인에 의해,
한국 사회의 교육에 경우에는
어른들에 의해 강제성이 부여되기 때문에
이런 교육을 받는 어린 참여자들에게
선택권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어른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것 이다.
어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은
그런 어른들이 주축이 되는
사회의 시선 또한 곱지 않다는 것 이다.
왜냐하면 사회를 이끄는 것은 어른들이며
그 아랫 세대들은 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이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정확히는 대학 입시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자본을 가진 어른들에 의해
사회의 문제아로서 낙인 찍히는 것 이다.
이런 문제아로서 낙인을 찍히지 않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어른들이 원하는
그리고 어른들에게 문제아로서,
이단아로서 취급받지 않기 위해
'입시 경쟁'이라는 잘못된 경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어린 아이들은
'인서울'이라는 타이틀의
매우 안타깝게도 타이틀 매치에
사실상 강제적으로 참여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 선조인 '고대 로마'의 문화인
콜로세움과 비교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 한다.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검투사는
경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참여자들과
경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참여자들 모두이다.
마치 투지가 있는 능숙한 검투사와 같이
콜로세움에 나가고 싶은 사람과
빚이 있는 사람이거나
자신의 신체적 자유가 없는 노예와 같이
콜로세움에 강제로 나가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콜로세움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돈과 명예 혹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스스로 싸우고자 하지만,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은
빚이 있거나 혹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또는 신체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강제로 참여하는 참가자들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러한 검투사들이
즉, 교육 참여자들이 치고박고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관객이다.
관객들은 패배자의 피를 뒤짚어쓴
승리자에게는 승리의 축복을 내리며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패배자에게는 가혹한 야유를 보내듯이
마치 '입시 시험'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둔
이른바 SKY에 들어간 승리자들에게는
한 없이 따듯한 격려의 말과 함께
그들의 앞에 축복의 길만 있기를 바라며,
'입시 시험'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지 못한
패배자들은 너희들은 '노력'이라는 요소가
승리자에 비해 한 없이 부족하고 게으르다며
SKY에 들어간 사람들을 보라며,
한 없이 가혹한 야유와 비난을 보낸다.
입시 시험이라는 경쟁과
콜로세움에서의 경쟁의 차이점은
콜로세움에서 패배할 경우 죽음을 맞이하지만
입시 시험에서 패배할 경우 패배자로서
참혹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잘못된 경쟁을 통해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낳았고
어른들은 이런 다수의 패배자를 보고
소수의 승리자들을 보라며
너희들의 '노력'이 부족하다며, 그리고 게으르다며
패배자들이 맛 보았던
조그만한 성공이라는 과실에 대해
모두 부정하며, 비난하고 힐난함으로써
어쩔줄 모르는 패배자들의 '자아'는 방황하여 갈길을 잃게 된다.
이런 다수의 패배자들의 자아에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희망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없는 절망이라는 감정으로 가득 찰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어른들에 의해
자신들의 희망을 담은 조그만한 과실이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작고 조그만하지만
소중한 '진보'를 가치가 없다며 거부 당한 것 이다.
이런 것에 의해 자아에 회복되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
물론 무사히 회복 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때때로 완전히 자아가 무너지는 사람도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자아가 갈 곳은
너무나도 추운 차디찬 '땅바닥' 뿐이다.
이에 더해 자아가 깨져버리고,
심지어 사회에서 거부 당한 사람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그들의 앞에는 사회에서 현재 만을 살아가면서
심지어 때때로 조롱을 받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비참한 현실 뿐이다.
자아가 회복하지 못하니,
'자아'에 대한 소유권이 점점 사라지며,
점차적으로 타인의 자아에 종속 된다.
이 타인의 대상은 사회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거나,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자아 성찰'은
더 이상 삶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는 자아가 깨져버리면서
사회가 '자아 성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아에 못 처럼 밖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러한 못을 빼버리고
스스로의 '자아'의 소유권을 되찾지만,
이런 사람들은 극 소수의 사람들 뿐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자아가 깨져버린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와 자본에 목을 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들의 문화에
욕설과 시니컬한 농담으로 가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 이다.
자아에 절망만으로 가득한데
그 누가 희망을 노래하겠는가?
한국 교육의 목표인 '대학 입시' 경쟁은
소수의 승리자만 낳고, 대다수의 실패자를 낳음으로써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대다수의 실패자가 늘어나면서
해소되지 않는 사회의 엔트로피가 쌓여
그에 대한 결과물로
지금의 한국의 사회 문제로서 나타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이런 '비열한 어른'들은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써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으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고 있다.
한국 젊은 사람들의 문화를 보면
스스로를 백수라 이야기하며
농담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염세적이고 시니컬한 농담은
세상을 다산 노인들에게 적절한 것 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들에게 희망보다는
편안과 안정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젊은 세대가 그러한
염세적이고 시니컬한 농담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희망보다는 안정이라는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가 공무원과 같은 안정된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 현상은
젊은 세대가 게으르고 꿈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원인은
그런 어른들에 의해 강제로 원치 않는
콜로세움에 참여자로서 참가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패배함으로써 '자아'가 박살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패배한 원인은 결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게을럿기 때문이 아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결국
앉을 수 있는 의자는 정해져있기 때문에
모두가 노력한다고 해도 앉을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비열한 어른들의 말 처럼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고 타인을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으로
타인의 자아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는
매우 저열하고 비열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노력이라는 것은
정량적으로 평가되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한다는것 자체가 넌센스이며,
더 나아가 인생이라는 것에 답은 없으며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왕도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비열한 사람들은
노력하면 모두 인서울에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순위가 있는 시험에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소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예컨데
100명의 대학 정원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 1000명의 사람이
시험을 치룬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말한것 처럼
1000명의 사람이 모두 열심히 했을 때
1000명의 모든 사람이 대학에 들어 갈 수 있을까?
100보다 1000이 큰 것은 매우 당연한 사실 아닌가?
어린 꼬마 아이도 할 수 있는 매우 간단한 수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학벌이 인생을 책임져 준다'는 이야기를
왜 계속해서 주장하고 그러한 교육을 계속해서 하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기준을 맞추지 못한 아이들에게
'노력'이 정량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너희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우리 모두가 노력하면 사회가 발전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노력이라는 말을 했다면
그것은 매우 잘 못된 생각이다.
이미 그런 논리는 존 내쉬의 이론에 입각해
충분히 논파 가능하다.
그의 이론으로
더 이상, 각 개인이 최선의 행동을 한다고 해도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모두가 노력하면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는 가정하에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에서 ‘노력’을 이야기했다면,
정확히는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생각하에 그런 이야기 한다면,
애초에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최상의 결과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이 증명된 시점에서
의미가 없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기저에 의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변명을 했다고 한들
그들이 타인이 행했던 노력을 부정하는 것 역시
매우 부당한 처사이며, 비열한 행위이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과 말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어떤 변명을 하던간에
그들이 그런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숨길 수 있을지 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한국 사회의 '비열한 어른'들
이런 현상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어른'들에게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러한 어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자신의 권위가 약해지며, 자신의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비열한 어른들이 취할 행동은 뻔하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책임을 떠넘기는 것 이다.
그러한 비열한 어른들이 책임을 떠넘기는 대상은
그 아랫 세대인 '젊은 세대'들이 된다.
어른들의 사회에 가장 강력하게 종속되어져 있으며,
그리고 그들의 '부모 세대' 이기도하고,
그들의 '고용주'이기도 하고,
그들의 '상사'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가장 가까운 '사회 선배'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아랫 세대인 '젊은 세대'가 가장 다루기 쉽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로
서열을 나누는 문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논리적인 설명으로 설득하기 보다는
나이를 들먹이며, 윽박지르는 것이 매우 효율적이다.
그런 비열한 어른들이 대개 이야기하는 것은
젊은 세대들에게 '노력이 부족하다'며,
지금과의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고,
심지어 사실인지 알 수도 없는
마치 판타지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마왕과
세계의 세계를 구하는 용사인 자신이 싸우는 것 마냥
자신의 훌륭한 영웅담을 이야기 한다.
이런 관계에서 대화가 이루어질리가 없으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토론으로 또한 이어질리가 없다.
왜냐하면 실제 자신의 자아보다
자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타인의 의견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실제 현실이 어떻건 간에
자신이 세계를 구한 용사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이에 부정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극도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 이루어진 것 이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거부하고, 토론을 거부하는데
경험도, 자본도, 권위도, 명예도 턱 없이 부족한
심지어 나이조차 어린
'젊은 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세대들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화와 타협이 존재하지 않으니
남은 것은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전쟁 할 수 밖에 선택권이 없다.
하지만 '어른'들과 비교 했을때
경험도, 자본도, 권위도, 명예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 누가 섯불리 전쟁을 하려하겠는가?
그런 전쟁은 자살과도 같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한국 사회는 해소할 수 없는,
그리고 해소하기 힘든 엔트로피가 쌓이면서
갈등이라는 사회 문제가 빠르게 대두되는 것 이다.
한국의 수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여기가 대화를 하는 장소인지 전쟁하는 곳 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사회의 비열한 어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젊은 세대에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 누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려고 한다는 말인가?
그러한 고통을 자식에게 떠넘기고 하고 싶어하는 부모는 흔치 않다.
대개 부모들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자식이 겪고 싶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명하다.
20세기 중반에 한국 전쟁을 겪었던
가까운 조상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아픔을
자손 세대들이 겪지 않고자,
자신들이 일제에 사과받아야 하는 권리를 달러로 받고
해외에 나가 달러를 벌어왔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한국의 역사가 아닌가?
자신을 삶을 버리면서 희생하면서 까지 말이다.
그런 쉽지 않은 희생을 한 가까운 선조들에게는
무구한 영광을 돌려도 시원치 않을 정도 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인 지금에도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혼자 외롭게 일하고 있는
기러기 아빠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런 사회에서
출산율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제 부모가 되어가는
그런 잘못된 교육을 받았던 세대들이 받았던 고통을
자신의 자식이 겪지 않았다는 이유라고 이야기 한다면
출산율의 하락은 너무나도 당연 하다.
당장 그런 교육을 받았던 나 자신도
내 자식이 그런 고통스러운 교육을 받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을 '콜로세움'에 보내고 싶어한다는 말인가 !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자식을 '콜로세움'에 보내고 싶지 않다.
결론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엔트로피가 최대점에
이르르면 한국은 어떻게 될까?
우주의 엔트로피가 한계에 이르러
우주가 한계까지 팽창되어 터지면서 빅뱅이 일어났듯이
한국 사회에도 해소할 수 없는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이르르면 터지면서
어떤 사회에 좋지 않은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틀림 없다.
엔트로피 세계관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이는 이미 수 많은 역사에서 증명하고 있듯이
한 나라의 멸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미 신용에 의해 얽혀있는 나라들이 많고
한국 또한 그런 나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과거 선조들의 나라가 멸망한 것 처럼
한국이라는 나라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 이다.
하지만, 그 국가에 대한 화폐 신용도는 급락 할 것이고
이는 국제 사회에서 신용과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미 한국은 IMF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의 신용과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국가의 멸망과 다를바 없다.
어쩌면 더 지독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생활 방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IMF 이전과 IMF의 생활 방식을 비교해보면
매우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어제 먹고 입었던 질 좋은 음식과
질 좋은 옷들은 얻을 수 없다.
미래의 한국이 이런 모습이 아니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다.
나는 여기에 한국이
이는 어른들의 잘못된 '교육' 방식이며,
좀 더 본질을 이야기하면
'경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일 것 이다.
더 나아가면
계속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에게 떠넘길려고 하는
'비열한 어른'들의 원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딱히 한국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고작 이러한 글을 쓰는 것 말고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과거 약 27년간 한국에 살면서 한국 사회에
내 스스로를 이해시키기를 실패 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사람이였고,
사회의 문제아 였으며,
윗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이 였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떨때는 친일파가 되기도 하고,
극우가 되기도, 극좌가 되기도 했다가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는 기회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이해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학벌, 좋은 학점, 수 많은 자격증, 토익, 토플과 같이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도 아니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오히려 평균 이하의 스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였다.
나는 한국 사회의 실패자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 한다.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나는 솔직히 잘 해낼 자신이 없다.
한국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에는
나의 리소스는 턱 없이 부족하다.
결국 한국 사회는
나를 원하지 않았던 것과 동시에
나 스스로를 한국 사회에 그리고
나를 떠나갔던 수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기에 실패한 것 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대로
한국 사회에 남아서 살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이상한 사람으로서의 딱지를 떼어내지 못했을 것 이다.
그런 삶에 과연 행복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 존재할까?
그러한 생각이 한국 사회에서 삶을 이어갔을때
더 나은 내일과 미래가
내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인프라들을 버리고
한국 사회를 떠나,
이런 나라도 나를 필요로하는 나라로 가서
새로운 사회에 접속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택했다.
결국 사회의 이단아로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기보다는
타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택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였다고 생각 한다.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면
그들과 다르더라도 외국인이기 때문에
다소 이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를 떠난 이상
한국은 나의 손에서 이미 떠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지 않는 이상
나에게 그러할 권리가 없으며,
더 이상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지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한국 사회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나의 가족과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사회이며, 나와 맞지 않을 뿐
누군가에게는 살기 적당하고,
적절한 사회일 것임에는 틀림 없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 많지는 않다.
내 바라는 것은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다.
어제보다 먼지 한 톨 만큼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원한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사회에도
그리고 살고 있는 사회도
어쩌면 미래에 내가 살지도 모르는 사회도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길 바랄 뿐이다.
이 글을 그런 비열한 어른들에 의해
자아가 상처받은 모든 이에게
그리고 미래에 그런 교육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나의 후손들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