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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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Essay - The People ] 우리(The People)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인식해야하는가


자본주의(Capitalism)!


현대인들에게는 땔래야 땔 수없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라면
나는 자신있게 자본주의를 선택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활은 자본주의에서부터 시작되고
자본주의로 끝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에게서 나오는 
기본적인 생각의
그리고 행동의 기저에는 
자본주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the people)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논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학자들이 정의하고 합의한 
학문적인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the people)들이 느끼고 있는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the people)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기저에 깔려있기에,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근거에도
이 자본주의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학문적 의미가 아닌 
실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논해보고 이를 인식하여
어떠한 깨달음이나 직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는 자본주의가 무엇일까라고 생각 할때마다
내가 대학생때 봤던 
ebs의 자본주의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그 다큐멘터리의 초입 부분에
외국 대학 교수들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데

외국의 대학의 교수는 웃으며 
한 마디로는 대답하기 힘들다며 
난색을 표하는 장면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이 처럼 자본주의의 정의에 대해 내릴 때 
나 또한 웃으며 난색을 표할 수 밖에 없다.

또한 학문에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해 
다르게 정의내리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정의가 옳다고 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정의에 있어서는
현재까지 '진리'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정의를 포함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부분적 진리'에 가깝다고 거나
'부분적 진리'조차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the people)들도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해 
적절한 '부분적 진리'를 다듬어서 이야기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자본주의는 
결과를 놓고 분석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할 뿐이지
현재의 자본주의를 이야기 해주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학자만이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개개인이 목소리를 가지고 힘을 가지는 
민주주의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에게 학자들이 
현재에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 한들 와닿지 않으며,
학자 또한 우리들과 같은 인간인 이상 
결코 자신들의 주장이 진리라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학자들이 근접해 있을 수 는 있지만)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깨달음 혹은 직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에 대한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고 있으며
학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the people)들 중 
나의 직감을 감히 

이번 에세이의 주제인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로 일단은 내리고 싶다.

그렇다면 
그러한 이야기를 시작함에 앞서서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시작해보자.

・자본주의(Capitalism)의 정의에 대해 


그렇다면 나의 직감을 끄집어내서
자본주의를 정의내려야만 한다.

우리(the people)들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다.
좀 더 근본적으로 파고 들어야만 한다.

자본주의의 요소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본주의에 요소에 있어서 
당연히 중요한 것은 '자본'이다.

'자본'은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 한다.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화폐부터 시작해
땅, 집, 컴퓨터 등을 포함한 실존하는 물체들
그리고 세계 시장에서 사용되는 물체들인 
채권, 주식 등이 모두 '자본'이다.

그렇다면 '자본'은 소유해야만 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강력하게 결합하는 과정에서
군주제가 몰락하고, 귀족 계급과 계급 세습이 사라지면서
귀족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사유 재산과 
사유 재산의 세습이 사회에 허용되었다. 

그로 인해
내 것과 남의 것이 분리됨으로써

스스로가 소유 하지 못한다면 
이용할 수 없게 되므로 
내가 소유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소유하지 못한다면 
활용할 수 없는 리소스 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미가 없다.

그림의 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리소스를 이용하기 위해
어떤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 
계속해서 소유하기를 바라고
소유하는데에 힘썼다.

그렇게 현대까지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번거로우며 리스크가 컷다.

그렇기에 최근에 들어서
(대략 2010년, 리만 사태 이후)
우리들은 '소유'를 줄이고, '임대'를 원하기 시작했다.
(리프킨이 제시한 
'접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접속'보다는 '임대'가 '
소유'라는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는 
'소유'와 '임대'를 하는것 또는
이를 얻기 위해 하는 행동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며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어떻게 인식해야 적절할까?


위에서 우리(the people)들의 자본주의에 대해 
'소유'와 '임대'를 하는 것 또는
이를 얻기 위해 하는 행동으로 정의를 내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리고 인식해야 적절한지에 대한 직감이다.

어느 정도 소유하고 
어느 정도 임대해야 적절한가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수 있으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자본주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잘 다루지 못한다면
소유와 임대하는 것에 그리고 
이를 얻기 위해 하는 행동에 집착하여, 

타의에 의해서건,
자의에 의해서건,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the people)들은 자본주의를 적절하게 인식하고
이를 잘 다루기 위한 직감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요소인 '소유'와 '임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소유'와 '임대'에 대해

누가 그랬던가
"현대 인류의 역사는 산업 혁명 이전과 산업 혁명 이후로 나뉜다"
라고 말이다.

이런 말에 나 또한 극히 공감하는 바이다.

유사하게 나는 자본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소유의 시대와 
임대의 시대로 나뉜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현재(2020년)는 
이미 임대의 시대에 막 접어든 시기이다.

산업 혁명 이후 부터 2008년 미국 금융위기(리만 사태)까지가
'소유의 시대'이고,
2008년 미국 금융위기(리만 사태)이후 부터는 '임대의 시대'이다.

리프킨은 The age of Access(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임대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리프킨은 '임대'를 접속(Access)로 말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1]소유권 중심의 시대에는
개인의 성공을 재는 중요한 잣대가 바로 자동차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동차를 산다는 것은
소유 관계가 중심이 되는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 의례와도 같다.

그것은 우리가 유산 계급의 일원이 됨으로써
떠맡아야 하는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하다.

통과 의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더욱이 자율성과 기동성의 가치를
유난히 높게 평가하는 문화에서는
이런 막중한 가치를 기계를 통해
이상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자동차라고 본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확인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 선언이요,
나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달라는 주문이다.

특히 남자들은 자동차를 애지중지하면서
자기 존재의 연장선상에서 자동차를 바라보고,
자동차를 통해 남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어한다.

그러니 자동차를 소유하는 데
커다란 의미를 두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이
중요한 가치를 두는 많은 제품처럼
자동차도 상품에서 서비스로 변하고 있다.

....

도로를 달리는 신형 자동차의 1/3은
자동차회사나 대리점의 재산이다.

소비자에게 잠시 임대해주었을 뿐이다.

고급 승용차는 절반이 임대되고 있다.

재규어 XJ모델의 경우 90% 이상이 임대 자동차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마린 카운티 같은
부자 동네에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60%이상이 임대이다.

승용차와 트럭의 임대 추세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독일의 경우 차량의 20%가 기업을 중심으로 임대되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 Access of age(소유의 종말)

위의 내용과 같이 
그는 사람들이 점점 '소유'에서 
벗어나 '접속(Access)'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의 책 The age of Access(소유의 종말)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바란다.

이 책은 놀랍게도 2000년에 출판된 책으로 
7년 후에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고
그의 영향으로 1년 후에 금융 위기가 터지게 된다.

그 후 세계는 다시 한번 격변하였다.
'임대의 시대'로 말이다.

세계 시장에서의 회사들은 
더 이상 과거와 다르게 생산 설비를 소유하지 않는다.

현재 최고의 기업이라고 손꼽히는 
애플은 생산 설비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반도체 생산은 TSMC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파운드리 회사에 맡기며,
조립 시설은 인건비가 싼 나라에서 조립하여

스마트 기기와 컴퓨터를 만들어 
세계 사람들에게 판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세상에는 이유 없는 행동은 없다.

애플과 같은 미국의 IT기업들이 
단순히 다른 기업들과 이익을 공유하고자 하는 
정말로 친절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제품의 반도체를 
파운드리 회사에게 맡기는 것일까?

그러한 마음이 정말 조금은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애플이 만약 생산 설비를 소유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지금과 같은 가격과 
퀄리티를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 위기가 다가올때 마다 
생산 설비를 소유하고 있다면 애물단지가 될 수 밖에 없다.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 대금, 운용비용 등 
계속해서 적자가 쌓여간다는 것은 
이미 금융 위기를 수 차례 겪은 
회사들에게는 익숙한 사실이다.

특히 금융 위기가 오면 
이런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로 뉴스가 떠들썩해지는 건 
거의 연례 행사처럼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 설비를 버리고,

문어발 식으로 확장했던 사업들도 정리하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다른 회사와 협력하거나 

협력할 수 없다면 
유망한 회사를 구입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과거에 회사 내부에서 연구를 진행했지만,
이제는 돈을 주고 유망한 회사들을 사서 
합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현재 삼성이 계속해서 
핵심 사업을 제외하고 정리하는 이유는 

삼성 경영진이 
갑자기 정신이 나가서 그런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빨리 급변하는 세계에서
문어발식 경영은 기업의 발목을 붙잡을 뿐이다. 

핵심 산업에 집중하면서
정말로 연구가 필요한 분야가 있다면
유망한 회사를 사서 합병하면 된다.

굳이 과거와 같이 계속해서 늘려가면서
리스크를 늘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과거에 미국 기업들이 시행하고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을
이제는 삼성이 따라가고 있는 것뿐이다.

삼성의 이러한 행보는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행위이다.

이러한 '임대의 시대','접속의 시대'에서 
문어발식 확장 경영과
생산 설비를 유지한다는 것은 
시대와 역행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각 개인들은 어떤가?

실제로 2020년인 지금 
자동차를 살 때 리스(less)로 
차를 사는 형태의 구입 방법이 존재하며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구입한다.

이에 벗어나 최근에
미국 회사 우버의 성공을 통해 
공유 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 했다.

회사의 물건을 소유하거나 
임대하는 것이 아닌

'소유'하고 있는 
개인에게 까지 '임대'하는 시대가 왔다.

이 뿐인가?

우버는
싼 인건비와 가까운 거리로 인해
한국만 누리고 있었던 배달 시스템을

'우리'가 하는 배달 시스템으로 바꿔서
똑같은 배달 플랫폼을 만들었다.

물건 뿐만아니라 사람까지도 
개인이 임대를 하는 세계가 되었다.

이런 세계가 되면서 
점점 우리는 '소유'를 최소한으로 
줄이게 될것이고

그 나머지는 '임대'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위와 같은 논의를 통해
우리(the people)들의 인식을 맞췄다면,

이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에 대한 
논의를 해봐야 한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회사에서 고용되어져
임금을 받는 방법으로 소유해왔다.

정확히는 '소유'만을 위해 살아왔다.

많은 소유를 하기 위해
다시 말해서 
임금(돈)을 많이 받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며, 
그에 따라 암묵적인 사회적 지위가 형성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 중요한 사람일 수록
임금은 높게 측정되며,

우리 사회에 중요한 사람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바로 
마커 주크버그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업가이다.

하지만 
임금이 높게 측정 되어있는 직업들이
모두 사회를 이끌어가는 직업은 아니다.

사회에서의 필요도에 의해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 수에 의해

즉, 수요에 의해 
공급에 의해
임금이 높게 측정 되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고연봉을 받는다는 
직업들이 그런 경우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이 
마치 마커 주커버그와 같은 
'자아 성찰'도 이루고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꿨고
그 결과 '자본'을 쌓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아 성찰'을 이루는 인간으로서
세계의 패러다임을 이끌고 바꾼 사회의 공로자로서
그에 대한 결과로 '자본'을 얻은 것 뿐이다.

엄연히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임금이 측정되는 개념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착각이
우리들을 철학자, 사상가와 같이 인류에게 
그리고 인류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사람들 보다는

마커 주커버그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게 한다.

하지만 대개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자아 성찰'과 '사회에 도움이되고 싶다'라는 이유보다는

성공이라고 쓰며 
'돈'과 '명예'를 얻음으로 읽는 것을 얻음으로써 
작게는 자신의 공동체 ,크게는 세계에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이야기에 
어떤 사람들은 매우 불편함을 감추지 못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에게 
왜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물어보면
대개 그들 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다'라거나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정말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라면
굳이 그들 처럼 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는 
사회에 도움이 된 사람은 수 없이 많다.

꼭 그들이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 사회속에 
사회에 도움이 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자본'과 '명예' 밖에 없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처럼 '자본'과 '명예'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역사로 기록된 약 2000년 이라는 세월동안
우리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정신적 선조인
기원전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역사를 보면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들의 후손인 현대인들 또한 
똑같이 그러한 짓을 한다는 것 자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한 것이 현대 인류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현대 인류의 한계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과거인들을 미개하다고 하며
현대인의 자부심에 취해 어깨를 으쓱하겠지만

본질적으로 과거인과 현대인의 차이는
기계를 좀 더 능숙하게 다를 줄 알 뿐이다.

기원전 인간과 
현대의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돈(자본)'과 '명예'를 얻고 싶어하는 
감정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바뀐것이 없다.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되면

어떠한 직업이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그러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우러러보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마치 '자본'을 많이 가지는 사람들이 
특별한 것처럼 보여지며
그로 인해 보이지않는 계급이 있는 것처럼 벽이 생긴다.

인간이 모두 똑같고 계급 따윈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극히 공감하지만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을 보며 
그런 사람들 처럼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며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다짐한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우월한 현대인인 우리들에게 봉건제는 
매우 야만적인 사회 체계가 아니던가?

'귀족'과 '왕'과 같은 계급으로 특별함을 구분하는 봉건제와
'소유'나 '자본'으로 특별함을 구분하는 현대 자본주의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렇게 야만적인 사회 체계에서 하던 짓을
우월한 현대인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월하다는 동물이 
야만한 동물이 하는 행동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봉건제에서 
마치 귀족을 우러러보는 어떤 평민처럼 
우월한 현대인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최소한 우리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우러러보면 안되며
돈으로 직업을 선택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언제 그랫냐는듯이
그러한 생각은 우리의 마음속에 
가장 구석진 곳에 쑤셔넣은 다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물론 난 현대인이 우월하다고는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선조들의 기록으로 인해 알 수있는 
약 2000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2000년전의 사람과 지금의 우리들은 기
계만 좀 더 능숙하게 다를 줄 알 뿐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우리들 중 일부는 
현대인이 우월하다거나,
혹은 더 나아가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는 역사 부터 지금인 현대까지의 
인류 중 가장 오만한 것이 현대인인것 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소유'를 맛 보았다.
그리고 그 중 일부가 '임대'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아래 있는 우리의 사회는
계속해서 소유되기를 바라고
임대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소유되고 임대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소비해서, 성장해야만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 아래 있는 
우리 인간들은 다르다.

우리는 소유나 임대도 원하기도 하지만 
그 외의 것도 원한다.

'자아 성찰'이나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느낄 수 있는 '유대감'과 같은 것들이다.

특히 그 중에 
'자아 성찰'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스스로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가 절망적이고 비참하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자아 성찰'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고
단순히 소유하고만 있다고 한들
스스로의 눈에서 보이는 세계가 밝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세계의 여러 나라들 중 
나의 모국인 한국 사회에서는 
'자아 성찰'이나 '유대감'같은 것들 보다는
더 많이 소유, 임대하는 것을 우선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임금을 많이 받는 
직업을 가지기를 원한다.

임금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가급적 좋은 학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좋은 학벌을 지니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출처가 불분명한 한국 대학 순위를 보며
높은 순위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높은 학벌을 가진 학교는 소수이며,
한 해의 정원의 수는 
한 해의 학생들의 수에 비해 매우 적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졸업을 하고 나서도 대학 입시에 매달린다.

한국의 이러한 현실을 살펴보면
이는 결코 
'자아 성찰'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좋은 학벌로 
좋은(임금이 높은) 직업을 얻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이다.

더 정확히는
남들보다 더 많은 임금을 얻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러한 것들로 인해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느끼고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이를 학구열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다.

오로지 임금이 높은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이지
절대로 학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한국 뿐만은 아니다.
한국이 정도가 심할 뿐이지
그러한 인식은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한껏 우쭐대고 있는 현대인들의 사회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구성하는 어른들은  
겉으로는 아이들에게 꿈을 꾸고, 꿈을 이루라며,
'자아 성찰'을 중요시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어린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좋은 학벌을, 좋은(임금이 높은) 직업을 얻음으로서
그러한 임금으로 더 많은것을 소유하고 임대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매우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는 이유는

사회 기저에 '자아 성찰'보다는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임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사회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결론

우리(the people)는 인간이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자아 성찰'이나 
'유대감'과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도구로서 활용해야 하지
'자아 성찰'이나 '유대감'을 얻는 것을 뒷전으로하고

단순히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임대'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결코 인간 답지 않다.

그리고 우리들의 교육은
계속해서 그런 인간들을 
만들어내는데에 한 몫하고 있다.

물론 
나의 논지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언급하는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다.

또한
그들 스스로가 
자이 성찰이나 유대감같은 것들 보다
자본을 쌓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막을 생각이 없다.

내가 소중히 하는 사람이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최선을 다해 설득하고자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밀의 '자유'라는 권위에 의해
나의 의견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도 정당하다.

우리들은 왜 친구를 사귀는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유대감'느끼기 위해서이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들은 왜 결혼을 하는가?
이성과의 '유대감'을 느끼기 위해
그리고 DNA에 각인되어 있는 자손을 낳기 위해서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들은 왜 일을 하는가?
'자아 성찰'을 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를 어떻게 인식해야하는가라고
누군가가 질문을 한다면 

적어도 우리들(The People)에게 있어서는
'자아 성찰'과 '유대감'같은 
감정을 얻기위한 도구라고 나는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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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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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소유의 종말, 제러미 리프킨 : 제1부 서비스 세상 p.110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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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초안 작성 및 개행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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