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이야기에서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장점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 것 같다.
반대로 오늘은 단점에 대해
그리고 그런 단점을 해결하기 위한 이야기 해보려 한다.
그때도 이방인으로서의 단점으로
사회라는 큰 틀에서는 어느정도 보호 받을 수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다고 언급한적 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보호 받을 수 없는 것중에
가장 고달픈 것은 '문화적 차이'다.
왜냐하면,
이런 문화적 차이에 따라
언어, 행동, 규칙 등이 상반될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모국에서의 '문화'에 익숙한 이방인들이
이런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언어, 행동, 규칙 등에 대해
특히, 이것이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을
알아내려고 할 때 가장 난감하다.
왜냐하면,
그런 문화적 차이를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방인들은 이런 '암묵적인 문화'에 대해 모르며,
자국민 조차 이런 '암묵적인 문화'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행위는 이방인의 모국에서는 칭찬의 행위이지만,
이방인이 머무는 나라에서는 모욕의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암묵적인 문화'의 경우
자국민은 이방인에게 무언가의 '시그널'을 보내지만,
대게 이방인은 그런 '시그널' 조차 지나쳐버리며,
알아차린다고 해도
이 '시그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못하면 행동하면,
이방인들의 행동이 상대로 하여금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물론 자국민들 또한 이방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한 행위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극도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이라면
자국민들은 그런 불쾌감을 쉽게 감추기 힘들다.
즉,
그런 이방인들이 모르고 한 행위라는 '이성'보다
극도의 불쾌감이라는 '감성'이 더 커지게 되기 때문에
'이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약 그 행위가 자국민에게
극도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이라면,
최악의 경우 공동체에의해 철퇴를 맞고
공동체로 부터 배제당할 수 있다.
따라서 이방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럴 경우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옳지만,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결국 대화를 하고,
같이 지내다보면
한 번쯤 그런 행위들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으로서
무엇을 해야할까에 대해 과거부터 고민했으며,
나는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데코룸(decorum)을 함양시키면 된다.
데코룸은 라틴어인데,
영어표기로 하면, 형용사로는 proper, 명사로는 propriety이다.
이런 데코룸의 뜻은
「사물의 적합함의 올바른 인식,
내면적 감성이나 외면적 표상, 언어,
행동, 의상 등에 있어서의 적합함」을 의미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어, 행동과 같은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들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사물의 적합함의 올바른 인식',
'내면적 감성이나 외면적 표상', '의상'과 같은 것은
함양할 수 있다.
'사물의 적합함의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는
밀의 '자유' 또는 '비판적 사고'
'내면적 감성이나 외면적 표상'을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철학책'과 거기서 드러나는 '개성'
'의상'인 자신만의 '패션'을 적합하게 함양할 수 있다면
언어와 행동과 같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것들을 위반했을 때,
즉, 될 수 있는 것들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를 상쇄시킬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즉,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의 캐릭터를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되도록 정확히 인식시켜야한다.
특히, 나는 '내면'보다는
'개성','패션'등과 같은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더욱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전 이야기에서도 말했듯이
이방인들은 잠시 접속해있기 때문에
문화에서 나오는 딜레마에
깊게 얽메여있지 않기 때문에,
즉,
'개성'이나 '패션' 등(물론 사회에 허용되는 한 안에서)의
외면적인면이 다소 허용되지 않더라하더라도
이방인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허용되기 때문에,
따라서 사회에서 허용되는 '개성', '패션'등을 함양한다면,
최악의 경우인 공동체에서 배제는 당하지 않으며,
대개는 공동체에서 이해받을 수 있으며,
어느 정도 공동체로 부터 보호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개성'의 경우는 사회마다
적절하다는 '개성'이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예를 들기는 쉽지 않지만,
'패션'의 경우는 적절한 것이 존재한다.
바로 한국어로는 정장인데,
내가 이야기할 '패션'은 이런 포멀한 정장이 아닌
한국에서 흔히말하는 캐쥬얼한 정장 스타일을 말한다.
나는 심플한 패션을 선호하는 편이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캐쥬얼한 정장 스타일로 가게 되었는데,
나의 이런 패션은 실제 이방인인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런 옷차림을 할때와 안할 때의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받는 취급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논하는것은 적절하지 못할 수 있지만,
내가 데코롬의 요소 중,
'의상'을 적절하게 착용함으로써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는
실제 나와 좋은 쪽으로 확연히 다를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에 살면서
흔히 '정장'을 어떤 중요한 자리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착용하는것을 보면
내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사람들이 '패션'이 중요하지 않다면,
굳이 '정장'을 입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패션'은 외모지상주의가
낳은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한 사람을,
정확히는 사회에서의
한 개인을 '브랜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브랜드'로서 '내면'인 철학적인면도 중요하지만,
'외면'인 '개성'과 그로부터 분출되는
'패션'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키케로의 말을 빌리면,
이것이 '데코룸하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방인으로서 문화적 차이,
정확히는 '암묵적인 문화'를 알 수 없으며,
언급해주지 않기에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이런 '데코룸'을 함양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쉬운것은 '의상'인 '패션'이며,
이방인으로서 자국민들과 조화를 이루고 싶다면
이것을 함양하는 것이 좋으며,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020.03.13
역근처 스타벅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