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현재시점,
일본의 히키코모리들이 40~50대에 진입하였다.
일본의 히키코모리라는 단어는 꽤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져 왔지만,
한국의 한 밈으로써 사용된것은 불과 10년도 안된것 같다.
이 히키코모리들이 많이 있던,
그리고 이런 단어가 일본에서 쓰여진 세대는
단카이 주니어(일본어 : 団塊ジュニア)
즉, 단카이 세대의 자식들의 세대가 1990년대에
많이 알려져있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중심에 있던 젊은이였던 시절이다.
바로 단카이 주니어 세대들 중
패배자들이 이 '히키코모리'이다.
단카이 주니어 바로 다음 세대를
'포스트 단카이 주니어'라 칭하는데,
이번 주제와 맞지 않으니
여기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내가 이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패배자들
'히키코모리'를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도 지금 젊은 세대들이
정확히는 80년대 후반 부터 90년생들이 이런
취업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패배자들인 '히키코모리'들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면전에 맞았기 때문에
비교적 일본 쪽이 더 심할 수도 있다.
우선, 이 80년대 후반 부터
90년대생을 XX세대라고 정의가 필요할 듯 싶은데,
이 세대가 유아기(20세 이전)에는 인터넷이 발달했고,
이들이 청년기(20세 이후)에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터넷과 기계에 익숙해지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의 인터넷이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는
첫번째 세대가 탄생했으니
여기서 이를 '네트워크 세대'라 칭하겠다.
따라서 이런 네트워크 세대에서
일본의 '히키코모리'들과 같이
사회에서 허용되는 신입으로서의 취업에 실패해
그 나이대에 가져야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지지 못하며,
이에 따라 사회와 단절되어,
사회인으로서 한 사람분을 못하게 될 때,
정확히는 '자아'가 무너지고,
'자존감'이 회복을 못하는 시기가 됐을때,
즉, 한국의 '네트워크 세대'의 '히키코모리'들이
사회에서 부각을 나타날때가 한국에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2020년)기준
89년생이 한국나이로 32세이고 만으로는 31세이니,
대충 10년 후, 그들이 40대에 진입하게 되는 순간
혹은 그에 근접했을 때
뉴스에서 '네트워크 세대'의
'히키코모리'들을 뉴스에서 떠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사회인으로서 내보내기 위한
사회적 비용이 꽤 나 들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비용을 쏟아부어 그들을 억지로
사회에 내보낸다고 한들
그들이 무리없이 사회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히키코모리'들이 사회에서 단절되면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정확히는 사람들과의 '공감'능력이
틀어박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결여되는데에 있다.
흔히 말하는 '사회성'이다.
이런 '히키코모리'들이 사회와
단절되는 원인은 비교적 명쾌하다.
사회의 진입 과정에서
회복 못할 정도의
수 많은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히키코모리'들이 신입 취업에서 실패하는 원인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사회가 급속하게 변함에 따라
기성 세대의 사고가
세계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히키코모리'들은
기성 세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경제가 몰락한 결과로
그들이 취업할 수 있는 문이 좁아짐에 따라 낙오된 것이다.
'네트워크 세대'의 '히키코모리'들은
세계 사회가 급변함(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의 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따라
실제 세계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이 바뀌었고,
인구가 폭발되던 시점에 태어났던 세대이기 때문에
다른 세대들과 비교해 비교적 취업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그들이 취업할 수 있는 문이 좁아짐에 따라 낙오되었다.
둘째,
이에 따라 기성 세대의
즉, '어른'들의 교육 시스템의 실패
교육 시스템에서 나오는 '훌륭한 인간'과
사회에서 원하는 '훌륭한 인간'의 미스매치에 따라
막 사회에 나온 청년들이 취업에 실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 시스템에서는 기성 세대가
기성 세대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교육 정책을 통해
'훌륭한 인간'을 육성하지만,
정작 사회는 기성 세대가 훌륭하다고 생각한
'훌륭한 인간'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교육 시스템에서조차 '훌륭하지 못한 인간'들 중
최하위권에 위치하는 젊은 사람들은
이런 사회 진출을 시도 해봤으나
모두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기성 세대의 교육의 실패로
젊은 세대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적절한 능력을 함양하지 못했으며,
그런 실패한 교육에서 조차
사실상 낙오되어버린 그들을 원하는 회사는 많지 않을 것이며,
선택권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셋째,
그리고 '어른'들의 교육 시스템의 실패를
'어른'들이 인정하지 않고,
'젊은 세대'의 탓으로 떠넘긴 것
가장 큰 문제는 여기서 있다.
왜냐하면,
위의 두 가지는 사실상 예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세계의 변화는
예측의 범위이기 때문에 맞추기가 쉽지않으며,
두 번째의 기성세대의 교육 시스템의 실패 또한,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시점에서
그것에 대비해 교육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예측을 실패했다하더라도
그로 인해 미스매치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기성 세대 들 중
자신이 훌륭하며, 자신의 경험이 '진리' 인듯이 주장하며,
성찰과 고찰없이 이런 신념을 가지고
교육 시스템을 만든 어른들에 의해서 시스템이 만들어졌지만,
자신들의 권위가
그리고 사회적 위치가 떨어질것을 두려워해
인정하지 않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실패한 어른들이 취하는 행동은 뻔하다.
이에 대해 언급을 꺼려하거나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남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여기서 '비열한 어른'들이 등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비열한 인간들이 하는 행위를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런 비열한 인간들이 기성 세대에 있다면,
이런 젊은 세대 중 실패자들은
그들의 좋은 먹이감이다.
그들은 실패한 교육 시스템에서 '훌륭하지 않은 인간'들을
'너희들은 실패한 이유는 노력이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을 봐라. 모두 취업하지 않았느냐? '
'다른 애들은 안그러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와 같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좀 더 노력해라'라고 하면
'자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사회'라는 것을 등에 업은,
'비열한 어른'들에 의해
이런 불쌍한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왔던,
그 중에 노력했고 어느 정도 혹은 조금이라도 성공도 해봤으며,
거기서 그 맛본 달콤한 열매가 그들에 의해서,
그들이 말하는 '사회'에 의해서 부정되었기 때문에
'자아'가 무너지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존감은 회복되기 힘들 정도로 '자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비열한 어른'들은
그들에 세대의 실패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인정해버리면
자신들의 주장하는 비난들이 설득력을 잃어버리며,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당성이 떨어지는 만큼,
자신들의 권위도 떨어지기 때문에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비열한 어른'들의 의해서
이렇게 일본의 단카이 주니어 세대 중 실패자 들은
'히키코모리'가 되버렸다.
그런 '히키코모리'들은 '오타쿠'로서, '프리터'로서
방에 틀여박혀서 살고 있는
진짜 '히키코모리'로서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 '네트워크 세대'의 '히키코모리'들이
그들의 '자아'가 무너지기 전에
그들이 사회에 진출 하지 못한다면,
일본의 단카이 주니어 세대 처럼
'히키코모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 부각될 시점에는 이미 늦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미 '자아'가 무너저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에 진출하지 못한
'네트워크 세대'의 '히키코모리'들은
일본의 '히키코모리'들 처럼
부모의 경제력을 사용하면서 같이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들을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 자신 또한 이를 너무나도 잘 알며,
그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비참하고 괴로울 것이기 때문에,
그런 현실에서는 자신의 '자아'가 버티질 못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자아'를 어루어 만져줄
자신의 '자아'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는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
왜냐하면,
적어도 게임에서의 '자아'는 훌륭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강해지며, 경제력도 생긴다.
경제력 만큼 자신의 장비를 비롯한
자본도 쌓여간다.
좋은 자본으로 게임속의 NPC와
그리고 강력한 적과 싸우고
이길 수 있는 자신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강해진 자신을 보고 도움을 청하며,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해가면서
자신이 온라인으로서의 '자아'를 키운다.
게임에서의 '자아'는 강하며,
경제력도 남부럽지 않고,
남에게 인정받는,
남이 필요로하는 훌륭한 인간이다.
하지만, 컴퓨터를 끄고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비참하고 고독한 '자아'가 기다리고 있다.
훌륭한 온라인의 자아와
훌륭하지 못한 현실의 자아의 갭을 느끼면 느낄 수록
더더욱 자신이 비참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 생각을 지우기 위해
드라마를 보며,
인터넷을 하며 잠에 빠지게 된다.
물론 집에서 게임과 드라마와 인터넷을 함을 통해
죽을 때까지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에게 쏟아 부어야 할 사회적 비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에 한국의 기성세대의 대처와 반응은
젊은 세대들에게
사회 활동, 좋은 학점, 수 많은 자격증,
TOEIC 등의 외국어 능력 등의 좀 더 경쟁력을 키우라며 요구했으며,
이것을 달성한 소수의 인물을 보고
더욱 노력하면 할 수 있다며 매몰차게 대했다.
그럼 그들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인가?
정말로 그들의 노력을 하지 않은 탓일까?
그들이 정말로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열한 어른'들은 둘째치더라도
어른들의 잘못은 분명하고, 자명한 사실인데
왜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비열한 어른'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은 이런 젊은이들을 비난할지 언정
자신들의 세대의 과오를 인정하고 싶지도,
언급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후에 과연 사회에서
한국의 '히키코모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할까?
'비열한 어른'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본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후에도
한국의 '히키코모리'들은 비참한 자아를 가지며
살아야가 할 것이고,
그들은 미래의 세대들이 지어야할 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길
바라는 것 밖에 더 있을까?
이런 현실이 고달플 뿐이다.
2020.03.13
역근처 스타벅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