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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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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생각 ] 모르면 가만히 있는게 정말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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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국인 한국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라는 격언이다. 지금 생각해도 한국 사회의 모습을  관통하는 정말 멋진 격언이라고 생각 한다. 이런 격언에 저주에 의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 전반에는 이런 의식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느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초, 중,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의 수업에 들어가보면  누구나 잘 느낄 수 있다. 또한 한국 사회에 나가면  이와 비슷하게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이다. 여기에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눈초리와 비웃음 까지 더 하면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격언이  완벽하게 진리 처럼 들려온다. 미래를 이끌어가야하는  어린 세대 그리고 젊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상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성 세대 또한 가만히 있는 문화에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한국 사회안에서 자라왔었고, 학생 시절을 보냈다.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의문점과 궁금했던 것이 굉장히 많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런 말에 대한 것이 였다. 초,중,고,대학교를 거치면서 굉장히 의문이 들었던 것은 '질문' 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학생이  질문 하는 행위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질문을 하는 행위는 민폐를 줄 수 있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수업 중에 질문한다는 행위는  수업의 흐름을 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앞에서 수업을 하는  선생 또는 교수가 말하는 도중  말을 끊는 행위는 예의 상 실례가 될 수 있으며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에게 또한 큰 민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터넷에서 이런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질문하는 행위가 무슨 문제냐'는 이야기가 꽤 많다는 것이다. 이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이상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이 반

[ 생각, Essay - The Orient ] 동양(The Orient)을 만들고 시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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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를 둘로 나누는 방법으로 자주 사용되는 것은 서와 동으로 나누어서,  서양과 동양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쉬울 것이며 우리에게 너무 나도 익숙할 것 이다.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나는 어떤 것을 직감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마음 구석진 곳에 집어 넣은 것들 중 하나이다. 왜 동양 국가는 서양 국가를 앞지를 수 없는 것 일까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확히는 동양 문화권은 왜 패러다임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한국에서는 전혀 이야기 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굳이 한국의 모자른 점을  들춰내면서 채면을 버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자른 점보다는 장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일반적이다. 하지만,  동양권 문화에서는 온갖 변명을 늘어세우면서  이를 애써 무시하려고 한다. 동양의 3마리의 용인  한국, 중국, 일본 모두 다 동일하다. 가장 먼저 일본이, 다음으로 한국, 그리고 지금의 중국은  세계에서 손에 꼽는 경제 대국이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급속도로 발전했다.  과거에는 일본이 서양 문화를 위협했었고, 그리고 지금은 중국이 위협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G1으로써  위치를 차지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중국의 정치 체계가 너무 나도 불안해보이기 때문이며, 과거 일본을 보면 썩 희망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결정적으로 사회의 패러다임이 항상 서양 문화권 특히, 미국에서 주도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인 스마트폰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은 미국의 실리콘벨리에 스티브 잡스가 이끄는 애플에서 불어왔고 그리고 가장 최근인 전기차는 미국의 테슬라에서  그리고 AI라고 불리우는 머신러닝은  구글의 알파고 팀에서 거대한 패러다임이 불어 왔다. 왜 그럴까? 그들이 패러다임을 이끄는 것은 단순히 우연일까?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이유 없는 행동은 없다고 생각하며, 이에 따라 이런 행동에 따라 나오는 결과 또한  대개 우연이 아니라는

[ 생각 ] 결국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리소스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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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리소스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라는 이야기를 내가 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엔트로피 세계관에서 이야기하는 석유,전기와 같은  에너지 자원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를 줄여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것이라 생각 된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리소스는 어떤 일을 수행할때,  그리고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만 할때,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리소스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리소스를 좀더 알기 쉽게 바꾸어 본다면 '능력'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수행할 때  어떠한 능력이 있다면  다소 쉽게 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따라 고른다면 다소 쉽게 풀릴 것이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어떠한 일을 수행할 때, 많은 언어들, 하드웨어에 대한 이해, 설계에 대한 이해 등의 이러한 능력이 많다면  우리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어려움 없이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 때   예를 들어  이직이나 전직을 해야만 한다면  다를 수 있는 언어, 경력 등의 이러한 능력이 많다면 우리가 전직과 이직을 할 때 많은 선택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능력들을 다시 말해서 리소스들을 모두 가지리란 불가능하며, 특정 리소스는  많은 시간을 쏟아 붇더라도 얻을 수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이라는  큰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으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능력, 리소스라는 것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시간이라는  큰틀의 개념에 살고 있는 현대 인류는  이러한 명제에서  그 누구도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리소스를  가급적 많이 가지기를 원하지만 시간의 한계가 존재하는 이상, 정확히는  우

[ 생각 ] 이방인으로서의 고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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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이야기에서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장점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 것 같다. 반대로 오늘은 단점에 대해 그리고 그런 단점을 해결하기 위한 이야기 해보려 한다. 그때도 이방인으로서의 단점으로  사회라는 큰 틀에서는 어느정도 보호 받을 수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다고 언급한적 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보호 받을 수 없는 것중에  가장 고달픈 것은 '문화적 차이'다. 왜냐하면,  이런 문화적 차이에 따라  언어, 행동, 규칙 등이 상반될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모국에서의 '문화'에 익숙한 이방인들이 이런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언어, 행동, 규칙 등에 대해 특히, 이것이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을  알아내려고 할 때 가장 난감하다. 왜냐하면, 그런 문화적 차이를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방인들은 이런 '암묵적인 문화'에 대해 모르며, 자국민 조차 이런 '암묵적인 문화'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행위는 이방인의 모국에서는 칭찬의 행위이지만, 이방인이 머무는 나라에서는 모욕의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암묵적인 문화'의 경우  자국민은 이방인에게 무언가의 '시그널'을 보내지만, 대게 이방인은 그런 '시그널' 조차 지나쳐버리며, 알아차린다고 해도  이 '시그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못하면 행동하면, 이방인들의 행동이 상대로 하여금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물론 자국민들 또한 이방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한 행위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극도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이라면 자국민들은 그런 불쾌감을 쉽게 감추기 힘들다. 즉,  그런 이방인들이 모르고 한 행위라는 '이성'보다  극도의 불쾌감이라는 '감성'이 더 커지게 되기 때문에 &#

[ 생각 ] 일본의 히키코모리들이 40~50대가 된 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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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현재시점, 일본의 히키코모리들이 40~50대에 진입하였다. 일본의 히키코모리라는 단어는 꽤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져 왔지만, 한국의 한 밈으로써 사용된것은 불과 10년도 안된것 같다. 이 히키코모리들이 많이 있던,  그리고 이런 단어가 일본에서 쓰여진 세대는 단카이 주니어(일본어 : 団塊ジュニア) 즉, 단카이 세대의 자식들의 세대가 1990년대에  많이 알려져있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중심에 있던 젊은이였던 시절이다. 바로 단카이 주니어 세대들 중  패배자들이 이 '히키코모리'이다. 단카이 주니어 바로 다음 세대를  '포스트 단카이 주니어'라 칭하는데, 이번 주제와 맞지 않으니  여기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내가 이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패배자들  '히키코모리'를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도 지금 젊은 세대들이  정확히는 80년대 후반 부터 90년생들이 이런  취업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패배자들인 '히키코모리'들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면전에 맞았기 때문에 비교적 일본 쪽이 더 심할 수도 있다. 우선, 이 80년대 후반 부터  90년대생을 XX세대라고 정의가 필요할 듯 싶은데, 이 세대가 유아기(20세 이전)에는 인터넷이 발달했고, 이들이 청년기(20세 이후)에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터넷과 기계에 익숙해지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의 인터넷이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는 첫번째 세대가 탄생했으니 여기서 이를 '네트워크 세대'라 칭하겠다. 따라서 이런 네트워크 세대에서  일본의 '히키코모리'들과 같이 사회에서 허용되는 신입으로서의 취업에 실패해 그 나이대에 가져야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지지 못하며, 이에 따라 사회와 단절되어,  사회인으로서 한 사람분을 못하게 될 때, 정확히는 '자아'가 무너지고, '자존감'이 회복을 못하는 시기가

[ 생각 ] 현대 교육을 통해 나오는 '우수한 인간'과 사회가 원하는 '우수한 인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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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현대 교육과 사회가 원하는 '우수한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주제는 현대 교육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시작하다 보니 우수한 인간까지 가버렸다. 따라서 현대 교육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창의력'이라는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런 특성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최근에 밀의 책을 주로 읽었으니 이런 주제에 대해, 밀의 생각을 조금 빌려올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기존 교육방법이 현재(2020년)에 맞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한국만이 아닌듯 싶다. 왜냐하면,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한 만큼, 변화라는 거대한 파도는 그에 비례해서 주기가 빠르게 변했다. 따라서 그 만큼, 사회에서 원하는 인재상도 빠르게 바뀌었다. 하지만, 현대 교육, 그러니깐 세계의 대부분 교육방법은 지식을 단지 쑤셔넣기에 집중하는 것에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지식을 쑤셔넣어, 누가누가 얼마나 잘 쑤셔넣었는지 대결이라도 하듯이 테스트를 보고, 그에 따른 점수를 부여 받는다. 이런 점수에 따라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평가 받게되며, 교육을 훌륭하게 받은 아이, 교육을 훌륭하게 받지 못한 아이로 분류 된다. 현대 교육은 이런 시험 점수를 통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며, (물론 그것이 정말로 객관적인지는 생각해볼 법 하다) 현대 교육 완수자들은 이런 객관적인 평가를 가지고 사회에 내보내지게 된다. 하지만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인간은 흔히 '창의력' 있는 인간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더 다양하게  공산품을 생산 해야 하는 2차 산업에서  서비스 위주의 3차 산업으로  고부가가치가 변했기 때문이다. 2차 산업에 필요한 것은  다량의 공산품을 정해진 규칙에 맞게  생산하기 위한 교육,  즉 정해진 시간에 학교(혹은 직장)로 등교(혹은 출근)하고 학교가 정한 구제적인

[ 생각 ] 개인의 철학책과 현대 자본주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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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철학은 학문으로서 어떤 사상을 연구하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어떤 물체, 사실 등을 '왜?'라는 질문을 통해 꼬리의 꼬리를 물며, 해답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사후세계란 존재하는가'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철학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이런 것들을 정리한 나만의 '철학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철학책'은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넣어놓은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들에 영향을 받을 수 는 있지만,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이런 '철학책'은 나의 이상을 현실에 대입해 볼때에서 나온 나의 간접적,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이며, 나의 사상, 나의 원칙, 나의 신념, 나의 꿈 등의 요소들을 담은 것들이다. 이 요소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밀이 말한 '부분적 진리'에 가까운 것들이다. 나는 나의 '철학책'들의 요소를 결코 '진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이상을 실험할 때, 경험을 통한 고찰과 성찰을 통해 나온것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인간인 이상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부분적 진리'에는 근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 혼자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맞으리라 보장도 없다. 따라서 나의 '철학책'은 '부분적 진리'일지도, 아닐지도 모르며 '진리'는 아니다. 그리고 나의 '철학책'은 끊임 없이 개선된다. 동양에서는 이런

[ 생각 ] 이방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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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방인이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외국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한국 사회는 너무나도 답답했고, 한국 사회도 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 나의 가치는 낮았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한국 사회는 신입에게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한국에서 살아 봤자, 나는 행복하지 않을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 그래서 나는 잘 다루지도 못하는 외국어를 배워서 외국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적응하기 까지 쉽지는 않았다. 수십 번의 고비를 맞았고, 그로부터 수십 번의 위기가 왔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정말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경우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잘 해결 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던 것은 모두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어쨋든,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들(대학 졸업 이후)은 내가 지금까지 얻었던 가치들 중에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진다. 이런 가치들은 내가 한국에 살면서 만나본 한국 사람들과 내가 겪어본 다양한 나라 사람들을 다양한 시각에서 비판해보면서 얻은 것들이다. 밀의 말을 조금 빌려 사용하자면, 의견이라는 광물에서 비판이라는 불순물 제거 작업을 통해 '부분적 진리'라는 원석을 손에 넣었다. 그 중에 얻은 원석 중 하나가 나는 결국 이방인으로서 삶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어떤 것에서 부터 자유롭다. 국적, 관습, 생각, 사상 등에서 자유롭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외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의 유전자는 동양인을 나타내고, 많은 동양인들 중에 한국인을 나타낼지 모르겠지만 나의 정신은 직접적으로는 다양한 나라 사람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다양한 나라에서 발간된 책에 의해 발달되었고,

[ 생각 ] 왜 스타벅스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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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스타벅스에 간다. 왜냐하면 세계어디든 존재하고, 스타벅스는 1인 자리도 충분히 많다. 그리고 노트북 충전을 할 수 있는 곳은 보통 스타벅스다. 그리고 어느나라건 스타벅스의 인테리어는 훌륭하다. 어느 가게는 그 나라의 그 지방의 특색을 더하는 인테리어를 하기도 한다. 오늘도 스타벅스에서 공부를 하던 도중에 왜 스타벅스는 인기가 많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은 누구나 알고 있는 스타벅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오늘의 중심 이야기는 왜 스타벅스가 성공했으며, 특히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스타벅스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먼저 스타벅스가 성공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스타벅스는 모두가 알듯이 커피 전문점이다. 그럼 스타벅스가 커피의 맛이 뛰어나기 때문에 성공했을까? 아니라면 스타벅스의 어떤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를 생각해보자. 스타벅스가 커피의 맛이 뛰어나서 그랬을까? 그건 아니다. 스타벅스의 직원은 보통 전문 바리스타가 하지 않는다. 스타벅스의 직원은 대부분 아르바이트 생이며, 커피는 전용 기계에서 내린다. 그렇다고 커피콩이 뭔가 특별함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판매용으로 나오는 커피콩은 단지 스타벅스의 상표가 붙은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커피콩이며 특별함은 없다. 그렇다고 매장에서 쓰는 것도 특별한 커피콩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어느 카페를 가던 카페라떼 계열의 에스프레소에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좋아한다. 거기에 스콘까지 있다면 간단한 식사에도 훌륭하다. 내 입맛에 가장 맞았던 커피전문점은 한국의 커피빈이라는 카페의 카페라떼다. 물론 전문 바리스타가 내리는 카페라떼도 훌륭하지만 내 입맛에는 커피빈의 카페라떼가 가장 맛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마셔봤던 카페라떼 중에서 가장 훌륭했다. 따라서 나에게도 스타벅스의 커피는 나의 입맛을 사로 잡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