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만화와 같은 스토리가 존재하는 매체에서
선한 주인공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구간이 존재한다.
흔히 이는 복수라는 감정을 이용해서 드러내고는 한다.
이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 인데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어두운 면은 가학성이나 폭력성과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 들 중에 속 한다.
이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들이며
어떤 이들은 이를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의해 악으로 규정해
이 세상에서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말살하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지만
이런 어둠들은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사회성'이라는
성향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지 언정
가학성과 폭력성과 같은 것들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추려고는 할 수 있어도 있는 것을 없던 걸로 만들 수 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성은 필요에 의해
개성 위에 사회의 관습이라는 천을 덮어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의 패러다임에 변화로 관습이 깨졌을때,
그러니깐, 이 천이 어딘가로 날아가려고 하는 순간
이러한 부분들이 부각되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즉, 각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본성들이 드러난다.
이러한 요소들 중 폭력성이 잘 나타나는 요소들은
잘 알려져 있어 어릴 적 부터의 철저한 교육(나쁘게 말한다면 세뇌에 가까울 것이다)에 의해
잘 구축되어 있는 현대 시스템에 의해,
그리고 이러한 어두운 면을 표출하는 것에 대한
높아진 리스크에 때문에 잘 통제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이러한 어두운 면 중에서
'자기 기만'은 통제되어 있지 않은듯 싶다.
외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자기 기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내면의 어두운 면들과 자기 기만이 합쳐지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나쁜 의미로 말이다.
예컨데,
폭력성과 자기 기만이 합쳐지면 폭력의 대한 정당성을
어떻게 해서든 부여하려고 시도 할 것 이다.
만약 그러한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또 한번 자기 기만을 해서라도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할 것 이다.
이 자기 기만이라는 것은 마치 사정권내에 들어와 있는
미사일 들을 격추시키는 방어 시스템과 같다.
매우 견고한 이 방어 시스템은 가장 큰 문제점은
이유야 어찌되었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정신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것들 모두를 격추 시키는 것에 있다.
문제는 어떤 사안에 대해 스스로 받아들여아하는 것들 또한 격추시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만들어버리는 것 인데,
이는 삶속에서 나타나는 규모가 크던 작던 간에
문제해결을 위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지만
이 시스템은 생존과 문제해결을 저울질 했을 때,
생존에 큰 무게를 두기 때문에
문제해결 상황 혹은 그 단계에서 아주 큰 걸림돌이 된다.
이외에도 이 어둠의 내면이
자신이 이상이나 꿈에 관한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면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이 왜곡되고,
이 왜곡은 문제해결에 있어서 더더욱 상황을 어렵게 만든다.
다만 이 내면의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어릴적 부터 듣고 배우게되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옳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이러한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로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반사회적인 사람으로서 판단되기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있는 리스크가 증가하기 때문이 두 번째 이유이며
받아들이는 것 자체로
스스로 자아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이러한 이유를 종합적으로 생각했을 때
어두운 면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보유하고 있는 지금의 자아를 지키지 못 한다면
당장 내일 부터라도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본다면 이것을 좋고 나쁜것으로 따지자면
당연하게도 나쁜 것에 속하는 것은 자명해보인다.
이 쯤 되면 이 시스템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할 것이다.
이 시스템은 어쨋든 오늘 지금 당장 생존하지 못한다면
생명체의 내일 또한 없을 테니, 개선 또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좋고 나쁘고는 인간의 판단일 뿐이고
이 시스템은 그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시스템 입장에서는 생존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없을 뿐이다.
이 시스템이 격추 시키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를 속여 자신의 잘못을 없는 것 처럼 생각하게 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거나
심지어 남의 잘못을 부각시켜 마치 자신의 잘못은
매우 사소한 것 처럼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를 자기 기만이라 부른다.
그리고 자기 기만의 종류 중 어두운 면에 속한다.
하지만 자기 기만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나쁘다고 보기 힘들 것 이다.
흔히 사회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과거에는 꿈이나 미래라는 단어로 불려졌지만
지금에서는 비전과 같이 불리우는 것들 또한
자기 기만으로 부터 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으며
정말로 그러한 미래가 자신에게 다가올지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오지 않은 이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꿈, 미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런 미래가 올 것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고
이와 동시에 달성 할수 있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에 있어서
자기 기만은 필수 불가결하다.
기나긴 고난한 과정에서
이 자기 기만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말 꿈도 꾸지 못했을 것 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단 한번의 도전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와 개선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겪어야만 하는 심리적인 좌절감과
현실 눈 앞에 보이는 수 많은 역경과 고난들은
자기 기만이 없고서야 버틸 수 없는 것 이다.
상상력, 혁신 등과 같은 인간 사회에서
최상위 가치에 두고 있는 이 것들 또한
좋던 나쁘던 자기 기만에서 부터 오며, 혹은 보호 받는다.
물론 자기 기만 하나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기만은 과정속에서 필요한 하나의 도구일 뿐 이다.
따라서 현재 없는 것을 있는 것 처럼
위에서 이야기한 자기 기만의 어두운 면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매우 동일하다.
그리고 이 것은 때로는 신념이라 부르는데
역사 속에서는 이러한 신념이 현실이 된적이 무수히 많다.
현대에서는 이러한 신념이 비지니스화 되어 자본주의에 최전방에서 있다.
아마 우리 구 인류에게 이러한 면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늘을 날 수 없었을 것 이고, 우주로 나갈 수 조차 없었을 것 이다.
그 속에서의 수 많은 실패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해낼 수 있다는 자기 기만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하는
내면의 어두운 부분은 이 자기 기만의 부정적인 면에 속한다.
아마 도덕성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이 내면의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찬가하는 도와 덕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매우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 도와 덕 넘쳐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신념이 현실을 왜곡 시키며,
이러한 이유에 의해 어두운 면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규정되고
더욱 심한 경우에 그러한 세상에 살고 있는 타인들을
마치 품위라고는 없는 야만인과 같이 취급한다.
(스스로가 그렇게 행동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찰하려고 하지 않으려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면에 있어서는 가장 인간답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야만인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우월감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자신 또한 구 인류라는 사실을 망각 한채
어두운 면들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이 들 중 일부는
어떻게 해서든 이 도와 덕을 세상에 널리 퍼트리고 싶어하는데
이 과정 속에서 도와 덕을 관습화 하려고 하고
이를 법으로 재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도가 성공을 이룬다고 해도
세상이 도와 덕으로 가득차기 보다는
오히려 도와 덕이 사라지는 형태로 발전하게 될 것 이다.
왜냐하면 도와 덕의 본질은 '자발성'에서 부터 오며
쉽게 행동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보상인 '자긍심'은
관습화되는 순간 사라지며,
사회 구성원들은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해야 될 상황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도와 덕의 한 가지 형태이기도 한
배려를 관습화하는 순간 배려는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그리고 배려라는 고부가가치의 단어 또한 오염에 침식되어 빛을 잃어버리고
동시에 가치 또한 사라지는 것 이다.
이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배려가 말살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결국 자발적인 행동이 거세된 도와 덕은 빈껍데기에 불과하고
남는 것이라고는 그럴싸한 허세만 남게 되는 것 이다.
그러한 행동과 행위로 자긍심을 얻을 수 없게 된다면
그들이 입을 튀어가며 이야기하는 도와 덕을 그 누구도 행하려하지 않을 것 이다.
물론, 겉으로는 매우 그럴싸해보일 수는 있다.
행동 자체는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도와 덕에 대해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연극 자체가 도와 덕으로 넘치는 세계로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들은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만족하고 있은 것 일까?
마음이 없는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아직 이에 대한 해답에 도달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게 될 그들은
이 세상은 썩어빠져있고 도와 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과 똑같이 도와 덕을 예찬하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구성원들을 도와 덕이 없는 야만인들과 같이 보이게 하며
그러한 취급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제국 주의 시절
서양 열강들의 '식민 사관'과 크게 다를바가 없으며
그들이 구 인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증하기도 한다.
가장 재미있는 점은 본인 스스로에게
그러한 도와 덕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이는 위에서 이야기한
자기 기만의 어두운 면이 막으려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도와 덕이 있건 없던간에
자기 자신에게는 도와 덕이 존재해야만 하며
그래야만 저 야만인들과 다른 자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같다는 인식과 그로 인한 무수한 생각들은
자아를 상처입히는 일이기 때문에
격추시키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 처럼 자기 기만의 프로세스에 의해
자신이 도와 덕이 있는지에 대한 검증은
왕이 자신의 성문을 특별한 검증없이 지나가는 것 처럼
너무나도 쉽게 통과시켜 버린다.
이것이 반복 된다면 내면의 어두운 면은
점점 마음 속의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하는데
가장 끝 까지 밀리는 순간
내면에는 자기 기만만이 존재하게 되며
그러한 기만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 없이
없던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기만을 생성해내야만 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만약 이렇게 해서 어떤 것을 쌓았다면
더 이상 멈출 수가 없게 될 것 이다.
자아가 파멸로 가기 전 까지 말이다.
정신을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 격추 시스템의 정지 버튼을 누르기란 매우 쉽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큰 문제를 이르키지는 않는데
고작해봐야 자신 주변의 사람에게만 피해를 주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고작이라고 표현 했지만, 이 경우도 주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러니깐 특히 가족 관계라면 당사자들에게 엄청난 큰 피해를 줄 것 이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세스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사람이
만약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이라면 어떠하게 될까?
이 경우는 문제의 규모가 다르다.
왜냐하면 타인이 이 것이 그의 신념인지 아니면
자기 기만이 낳은 망상인지를 알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후자라면 사회 전체는 망상을 이루기 위해
한 세대가 최선을 다해 자원을 낭비하게되는 셈이니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에 많으면 많을 수록
그리고 그 사람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면 증가할 수록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이루고자하는 방향과는 매우 다른 길을 가게되므로
꽤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그 혹독한 대가는 대게 그들의 자손이 받게될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내면의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스스로를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 사회를 위해서
이 내면을 받아드리고
이를 다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격추 시스템이 발동하게 될 것 이고
끝 없는 자기 기만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이,
음식을 먹을 때 내장기관이 소화를 하듯이
이 자기 기만은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소식이겠지만,
따라서 이는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기 기만의 부정적인 면이 내면에 날뛰게 나두면
즉, 어두운 면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것 이다.
훈련 과정에 있는 개를 보면
가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개가 흥분을 참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개 입장에서는 사람이던 동물이던
안전하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것 외에는 전부 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짖거나 때로는 공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 이다.
그것이 개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로 더 이상 개가 대부분의 경우
영역을 지키는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현대에는 훈련을 통해 공격성을 억누를 필요가 있다.
현대인도 그렇지만 유전자의 변화의 시간보다
사회의 변화가 압도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개들을 본다면
무섭기 보다는 오히려 감탄하고 만다.
왜냐하면, 조금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에게서 인간적인 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생존이라는 본능을 억누르고 리스크를 받아들여
고도의 문명을 손에 넣은 인간의 모습을
고작 일부분일지라도 개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하다.
이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자기기만의 어두운 면 또한
본능이기에 컨트롤 할 수 없으며 억눌러야만 한다.
물론 우리가 구 인류인 이상
완벽하게 이 부정적인 면을 다룰 수는 없을 것 이다.
이에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야 말로 신 인류 말고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부정하면 부정할 수록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더욱더 힘들어지고
우리 스스로가 이룩하고자 하는 미래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된다.
이는 무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테니
그 끝에 도달해야만 깨달을 수 있을 것 이며
그 때가 된다면 아마 무언가 대처를 하기에는 충분히 지났을 것이다.
구 인류인 나 또한 이 어두운 면을 받아드리려고 하고
계속해서 다루려고 시도하고 있다.
나는 이를 훌륭히 다룰 수 있을 때가 될 때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는 것 이고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보석, '개성'이 드러나게 될 것 이라 생각 한다.
태양을 손으로 감싸려고 해도 미세한 빛이 손 밖으로 흘러나오듯이
스스로의 개성을 갈고 닦았을 때,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교양(또는 매력)이 드러날 것 이다.
어떠한 사람들은 특정한 행동으로서 혹은 수 많은 지식을 마치 쑤셔넣으면
마치 자연스럽게 교양이 드러난다는 것 처럼
훈련하려고 시도하는데 아마 대부분 실패 할 수 밖에 없을 것 이다.
인간미(개성)가 없는 교양 따윈 우스꽝스러운 연극과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치 현실과 연극이 구분 안갈정도로 보이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너무 치명적이다.
매 순간 순간 긴장하고, 이를 다루기 위해 주기적으로 훈련을 해야만하니 말이다.
그리고 한번 발을 헛딫은 순간 지금까지의 노력과 투자한 모든 것들은
물거품이 되듯이 사라질텐데 이는 이를 감내할 만큼 가치가 있을까?
이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효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데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리소스를 투자하는 것이
어느정도 스스로에게 가치가 있냐는 것 이다.
내 생각에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어두운 내면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여
억눌러서 다룰 수 있을 때야말로
우리는 구 인류의 한계라는 굴레에서 다소 벗어나
끝이 없어 보이는 진정한 인생을 시작하게 될 출발점에 서게 될 수 있을 것 이니
이 어두운 내면을 다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