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성으로는 인종 차별이 행해지면
안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종으로서 보면 인종과 관계없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은
사실상 없을 것 이다.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현대인들 또한
모두 인류로서는 모두 같다.
하지만, 인종 차별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미국만 보더라도
이제 백인과 흑인간에 갈등은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왜 인종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까?
나는 이에 대해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어떤 직감을 얻었다.
이번에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현재와 과거의 인종 차별
현재의 인종 차별과 과거의 인종 차별은
조금 다른 성향을 보인다.
과거에는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가르친다는
한국에서 매우 혐오하는 '식민 사관'에 의해
이런 우월과 열등의 관계 속에 행해져왔다.
물론 그 속내는 값싼 노동력을 얻고
잉여 생산물을 소비시키기 위한 행위였지만 말이다.
현재의 역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인종 차별은 조금 다른 성향을 띈다.
대개 사람들에게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가르친다는 인식은 보이지 않는듯 하며,
이방인인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경제력에 기반해
자신의 나라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경제력을
가지는 나라의 사람들을 깔보고 멸시하는 사람들 말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대놓고 한다면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강력한 철퇴를 맞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의 수 많은 이러한 비열한 인간들은
특정한 행동을 취한다거나, 돌려말하기를 즐겨한다.
물론 그들이 비열한 인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신이 특별한 인간임을 느끼고 싶은
그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거의 인종 차별이 조금 변질해서
잘 발달된 나라의 사람이 발달되지 않은 사람에게
느끼는 우월감을 외적으로 표출 한다.
한국으로 예를 들면
예컨데, 공장에서 일하는 동남아 이방인들을
사회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을 보면 확연하게 느낄수 있다.
미국으로 예를 들어도 한국의 예에서
동남아 이방인을 동양인 이방인으로 바꾸면 완벽히 동일하다.
재미있게도 이는 잘 발달된 나라들 중에서도
흔히 지표에 들어나는 숫자로
우월감을 표출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이 얼마나 특별함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욕망이 얼마나 큰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정말 재미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비열한 사람들에게 자주 보이는 성향이기 때문에
현재 인종 차별이라고 보여지는 것에 변질되기 전과 비교하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 한다.
과거 식민사변이 당연시되었던 것 처럼
현재 인종에 따라 차별을 두어서 안된다는 것은
당연시 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사회적인 철퇴가 두렵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비열한 사람들은 그저
어느 시대에도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며
그들은 평소에도 같은 민족이라도
타인을 경제력,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핍박하고 괴롭히며
자신의 비열한 만족감을 얻고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 별로 놀랄것 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인종 차별의 특성
이런 새로운 인종 차별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물건 뿐만아니라 노동력까지
무역이 일어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노동력 중에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비싼 노동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에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즉, 좋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으며, 귀하며, 가치가 높다.
하지만, 문제는 노예 해방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값싼 노동력이 수입되면서 이루어진다.
값싼 노동력이 수입되면서,
기존 원주민들 중
이런 노동력을 업으로 살아가던 원주민들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삶의 근간을 빼앗기기 시작 한다.
그들의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서양 열강들이
원주민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것 처럼 말이다.
동일하게 비교적 낮은 가치의 노동력을
업으로 삼고 있던 원주민들은
마치 주변 동료들이 살해 당하고 있으며,
자신의 귀중품을 약탈 당하는
원주민들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분노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대부분은 그런 노동을 하며 살아갔고,
그들이 삶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며
그것이 그들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삶을 빼앗겼는데 분노하지 않을 사람들이 누가 있겠는가!
그들의 분노의 대상은 당연히 이방인들이다.
특히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다수의 이방인들일 것 이다.
그리고 전 세계의 비교적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동양권 사람들(특히 중국인)은
전 세계의 서양 원주민들의 타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그런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들의 분노가 다소 정당해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내제된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면서
나쁜 인식이 사실이던 거짓이던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지고
계속해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면서
수 많은 루머를 낳고, 나쁜 인식이 전해지고,
이로 인해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간접적인 경험을 하면서
사회 외적으로 '동양인에 대한 인종 차별'로 나타나게 된다.
나는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올해 초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동양인을 향한 좋지 않는 시선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사회 문제로 나타나는 순간
다른 사회에서 사는 이방인이 아닌
자국에서 살고 있는 동양인들에게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인종 차별'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즉,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인종 차별에 대한 것들에 대한 기저는
노동력까지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나타나는
원주민에 대한 이방인의 노동 침략이 깔려 있다고 나는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저로 인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또는
그런 말로서 전달받으며
간접적으로 경험한 서양 원주민들이
동양 이방인들에게 야유를 보내거나 눈을 찢거나
하는 행위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다.
이런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조금은 납득 할 수 있을 것 이다.
또한 이러한 사회 현상이 다음 세대를 관통하면서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종 차별적인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자국민들의 사회적・물리적 철퇴를 당하지 않게됨으로써
겉으로는 인종 차별이 나쁘다고 생각해도
무의식 적으로 차별적인 행위가 표출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행위들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종 차별은 서양권에서만 나타나는 특성인가?
그렇다면 이런 새로운 특성을 가지는 인종 차별은
서양에서만 나타나는 것 일까?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꼭 그렇지는 않다.
나의 모국인 한국에도 이런 차별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 가장 밑에 자리하는 노동자들은
점점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하는
중국인, 몽골인, 파키스탄인 등의
이방인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자신의 삶을 빼앗은
서양권 사회의 동양인에 대한 시선과 동일하게
낮은 경제력을 지닌 동양권의 이방인들에 대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한듯 하다.
특히 중국인에 대한 시선과 이에 따른 불쾌감은
나의 피부를 찌를 정도로 강력하다.
다만, 한국에서의 이런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는
서양권하고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삶의 터전을 빼앗김으로써 나오는
새로운 특성의 인종 차별보다는
그들과 비교해 경제적으로
우위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으며,
자신이 그들과 비교해
높은 경제력을 지니고 있고,
전체적으로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풍족한 삶을 살고 있고
보다 교양 있으며
자본까지 가지고 있다는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또는
같은 한국인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약자멸시'를 하기 위해
즉, 과거 인종 차별의 특성에
조금 변형된 인종 차별의 느낌이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경우 이방인이 원주민의 삶에 터전을
빼앗겼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비교적 젊은 계층들이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업계 또는
그러한 비전이 있는 업계와 회사에 눈길이 돌아가면서
즉, 기존 2차 산업인 제조업에서
3차 산업인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넘어가면서
기존 2차 산업인 제조업
그 중에서도 급료, 업무 환경 어느 것도 만족할 수 없는
(타의이던 자의이던 간에)
수 많은 제조업의 노동자들의 공백이 발생,
이 공백은 자연스럽게
동남아 외국인 이방인들에게 의해
채워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값싼 노동력은
높은 경제력을 지니고 있는 나라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것 이다.
왜냐하면
고부가가치 산업의 높은 임금과 업무 환경
그리고 비전에 고개가 돌아간 자국민들에게 있어서
힘들며, 대체 가능하며,
낮은 임금을 가지게 되는
누군가는 해야만하는 직업을
자발적으로 대신 해준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외국에서의 삶이라는 리스크를
스스로 짊어지면서
사회의 밑 바닥을 구성해준다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과거 노예와 가장 큰 차이점은
소비를 통해 사회에 유효 수요를 얻어 낼 수 있고
기대 외의 세수 창출과 지금에 와서는 출산률 까지
단기적으로 바라봤을 때
리스크는 낮고 이득은 높은 정책이다.
이에 더해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이유야 어찌되었던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는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단기 비자를 쥐어주며,
자국민이라면 누구도 일하려하지 않는
저임금 고강도에 환경도 열악한 생산 공장에 투입하여
사회 밑바닥을 어떻게든 커버하려고 한다.
사실상 식민지만 존재하지 않을 뿐
합법적인 현대판 노예와 다름 없다.
하지만,
사회의 밑 바닥에 있는 한국의 자국민들 또한 그러하듯이
비교적 파워 게임에서 밀리는 구성원들은
온갖 멸시와 수 많은 명분에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하는 이방인들은
이러한 멸시와 조롱에 더해 인종 차별 까지
동시에 받아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매우 참혹할 수 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생산력이 뛰어난 이방인들은 논외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에 대해
경제력이 높은 나라의 사람들과 자국민들은
부정하고 싶을 것 이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챙기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조금 강하게 말해서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내부의 치부를 외부에 발설하는 것은
'정'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면죄부가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인종 차별이 옳지 못한다는 인식은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더더욱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특성은 단순히
서양인이기 때문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인종 차별의 기저에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어떤 사람이 선하고
어떤 사람이 악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값싼 노동력이 수입되었을 때
경쟁력을 잃은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면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사회문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해결할 수는 있을까?
본질적으로 원주민에 대한
이방인의 약탈로 인한 인종차별이건
우월감과 멸시를 위한 인종차별이건
이러한 인종차별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입으로 떠들건 행동으로 하건
인종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처럼
인종 차별은 사라질 수 있을까?
아니 더 나아가서
인종 문제를 떠나서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나는 해결 할 수 없다에 한 표를 걸겠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한계에
부딫쳐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특별하고 싶은
그리고 우월하고 싶다는 욕망은
현재 인류로서는 뿌리치기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욕망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인류는 이상론자들이 노래하는
도덕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노래하는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이
마냥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특별해지고 싶다,
우월해지고 싶다는 욕망 덕분에
현재의 인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기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쉬운 동기부여 매체가 어디있겠는가?
"좀 더 많은 급료를 받고 싶다."
"저 사람보다 더 능력있고 싶다." 등의
그러한 단순한 욕망이
조금씩 인류를 진보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단순한 욕망이
서로 서로를 협력하게 해주는
강력한 연결 고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가 있다고 한들
타당해보이는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가 행한 인종 차별 행위를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스스로를 기만하는데에서 그치면
큰 문제는 없을지 모르겠으나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신을 보호하거나
자신 혹은 단체를 위해 이를 사용하게 된다면
그리고 타인이 이러한 기만에 속게 된다면
이러한 기만 요소가 삶 전체에 크면 클 수록
그의 인생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질 것이고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그 또한 스스로를 속이게 되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는 없다.
인간의 한계에 부딫쳐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다수의 사람을 계몽한다고 해도
이는 해결할 수 없을 것 이다.
만약 현재 인류에게 이러한 욕망이 없다면
현대인들은 지금의 문명을 누릴 수 없었을 것 이다.
만약에 먼 미래에
이러한 욕망들을 다루는 유전자가 발견되고
이러한 유전자를 없앤다면
그들이 말한대로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어쩌면
현 인류의 가장 큰 성장 동력을
잃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한 번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란
현실에서 매우 드문일이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면,
무엇을 주거나 잃어야 한다.
결론
이러한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는
적어도 나는 내가 죽을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 한다.
나도 그런 이방인들 중 한 명으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어떤 사람 입장에서는 나 또한
원주민을 약탈하는
이방인 처럼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
내가 없다면 원주민들 중 누군가가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내 스스로 부정하기가 힘들다.
그런 생각에서 그들이 나에게 혐오감을 들어낸다면,
내 입장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들의 입장이 충분히 납득이 가고,
그들의 분노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정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외의 이유에서
그리고 특히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특별함'을 느끼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위라면
나는 불쾌감을 감추기 힘들 것이며,
정당하지 못하다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인종 차별을 함으로써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개인의 비열한 욕망을 만족 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 타인 혹은 공동체
더 나아가서 민족과 나라에 대해
타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하는 행위는
경우에 따라서
노동의 침략이건
자신의 이득이건
이유 없는 혐오와 증오이던간에
자신의 비열함을 숨기고
체면과 비열한 만족감을 만족시키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원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사회의 물리적/정신적인 철퇴의 리스크를
대신 짊어져줄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사회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고
정치적으로 매우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 입장 등에 따라
강하게 혹은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뿐
집단, 단체, 정당, 민족, 나라로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절대로 인종 차별은 사라질 수 없다.
따라서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으며, 대응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도 하며,
소모성 논쟁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에
시간 낭비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 또한 현실에서 이런 논지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물론 그렇다하더라도
인종 차별을 떠나 차별을 하면 안된다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의 행위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이야기이다.
적어도 내 머리속에
밀이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들이 행하고 있는 행위들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적어도 인류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이상
인종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것 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불합리함을 받아들이고
개인의 성향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는 수 밖에는 없다.
이러한 나의 논의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이 열려있는 듯 싶다.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인종 차별을 행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한계에 부딫치며
이 욕망 위에 올라타 대담하고 위험한
탭 댄스를 출 것인가 말이다.
물론 그 누구도 입으로는
인종 차별을 행한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겠지만 말이다.
지울 수 없는 이 내면의 욕망은
거부하기 매우 힘들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계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나쁘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처럼
결코 악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면죄부가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오히려 수치스러워하는 것이 정말 인간 다운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우월감 뿐만아니라
이 욕망의 한계에 부딫치는 사람은
다룰 수 힘든 이 폭력적인 말을 다루고자하는 사람은
자연스럽지 않지만 높은 가치를 지닌 사람이다.
대담하고 절제 있는 이런 사람이 가치가 없다면
이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우는 사람보다
이런 내면의 욕망과 싸움 하는 사람이 진짜라고 생각 한다.
그렇지 않은가?
내면의 리바이어던에 굴복하고 따르는 사람보다
눈앞의 리바이어던에 승복하고 한쪽에 눈에 창을 꽃아넣으며
피흘리고 쓰러져가는
무모하고 용감한 사람이 진짜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진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리더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지닌 사람들 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런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이런 사람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것이고
그러할 준비가 이미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