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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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Essay - The People ] The People들은 책임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Can The People be free from responsibility : 1) : 1


인민(the people)은 책임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보다 흥미로운 질문은 흔치 않을 것이다.

과거 부터 이런 생각이 머리속을 맴돌았기에,
그리고 이번에는 이런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의욕이 강하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에세이를 써보면서 정립해보려 한다.



우선 들어가기 전에 서론 이후에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대신에 the people을 쓸 예정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다른 언어로 바꾸어서 따로 작성할 예정이지만
초안은 한국어로 작성할 것이기 때문이며,
개인 블로그에 올라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현재 한국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는
대개 좋지않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미가 실제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과는 상관 없이

실제 인민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좋게는 받아들여져 있지는 않기 때문에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 대신
the people을 사용할 예정이다.

물론 이번 주제가 인민에 대한 것이고
the people의 번역으로서 인민이 적절함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 에세이는 개인 블로그에 올릴 예정인 에세이로
누군가 본다는 가정하에 작성되어지고 있다.

내가 인민이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나의 글에 비판적인 생각이 아닌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 후에는 조금 번거롭더라도
인민이 아닌 가급적 the people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어쨋든
내가 이런 주제와 같은 의문을 가진것은

나를 포함하고 있는 the people들은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고,

그런 것들이 '진리'라고 여겨져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현실속에서

the people들은
어떤 책임감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며,
그런 인식이 사람들의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사실은 매우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집단이 아무리 뛰어날지언정
'인간'자체를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고

그러한 사실이 우리의 가까운 과거에 증명되어왔지만,
누구도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회피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에서
the people들이 책임감으로 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나의 이성이 그러한 것들을 거부하게 만든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내가 이야기할 내용을 보고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니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런말을 하느냐고
비난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들에게 해줄 말이란, 아무것도 없다.

늘 그들이 하는 대로 욕을 하며,
이러한 사실이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으며,
고찰도 성찰도 없는 삶을 살아가면 된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가
그러한 사실에 인정하지 않고 그러한 삶을 산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지 언정,
나는 그들의 삶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며,
꺼려하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할 것이며,
인정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고찰하고 성찰하여,
'부분적 진리'라는 원석을 찾아 낼 것이며

그것들을 철학이라는 그릇에 담아 삶에 녹여,
'나만의 철학책'이라는 훌륭한 무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무기를 들고
나는 세상에 나가,
나의 무기를 시험하게 할 것이다.

그런 과정으로 부터
나를 성장시켜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어서

작게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크게는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들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았으면 한다.

어쨋든
먼저 the people들에 대해 논하기 앞서,
the people에 대해 정의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The People에 대한 정의


이에 논하기 앞서
정의를 먼저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어떤 한 단어에 대한 직감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누군가가 나에게
the people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 아래
정치 체계를 갖추고 있는 국가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라 대답할 것이다.

한국어로 말한다면, 국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은 the people(인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이념 아래서는 국가가 주체가 아닌
그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people)들이 주체이기 때문에
국민 보다는 the people(인민)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이유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the people(인민)은 사용하기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며,

그렇기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국민이라는 단어가 더욱 익숙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민(the people)이지,
국가에 속해 있는 국민이 아니다.

인민(the people)은 국가에 속해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인민(the people)이
국가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 맞기 때문이며,

국가의 주체는
the people들이라는 사실이 민주주의에서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국민과 정반대의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자유 민주주의 이념아래 정치체계가 구축되어 있는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전체를 the people(인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진리'로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The People들의 대표자 '정부'


현재 the people들의 정부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투표를 행사에 그들 안에서 대표자를 선출한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 아래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개 투표로 선출 된다.

과거의 군주정을 머리, 몸통, 팔, 다리가 달린
하나의 인간이라고 한다면

현대의 자유민주주의의 정부는
머리만 남아 있는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렇게 선출된 대표자들은
이런 머리의 역할만 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권리 또한 그에 한정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제외한 기관들에게 이야기하여

이를 설득시키고
타협하여 국가 정치를 시행해야만 한다.

하지만 대개 이상이라는 것은
관념과 관습 때문이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던 간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지금까지 인류가 도달해본적 없는 곳이다.

따라서 그런 이상이 아늑히 높건
가까이 있던 간에,
그것이 우리의 미래에 득이 되건
득이 되지 않건 간에,
the people들이 그런 이상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이런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 많은 고난과 시련이 기다릴 것이고,
the people들이 그것을 이해하기 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릴것 이다.

하지만, 현대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그러기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독재를 막기 위해
임기를 정해놨기 때문이다.                                                                                             

임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임기마다 선출된 대표자의 이상은
대개 꽃피워보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The People들의 자라온 방식 '교육'


왜냐하면,
현대의 the people들에게
논의와 비판에서 나오는

그리고 고찰과 성찰이라는 달콤한 열매는

마치 다른 나라에서 물 건너온 특별한 과일과 같이
the people들에게는 낯설기 때문이다.

아마 이에 대해선
단순히 '지식'을 쑤셔넣는데에 집중하는
현대 교육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현대 교육에서는 '시험'이라는 것을 통해
교육받는 학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데,

이런 '시험'이라는 것은 대개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적는 방식의 서술보다는
5개의 질문 중 하나를 고르는
5지선다의 류가 많다.

시험을 서술로 보게되는 것은 한참 후에인
'대학'에 들어가서야 조금 맛볼 수 있지만

이 또한 대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옹호하고, 비판 받고,
다시 고찰하고 성찰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서술은 아니다.

오직 어떤 한 사실에 대해
다른 누군가(대게 학자)의 의견을 배운다.

여기서 배움이란,
단순히 그러한 사실을 익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에서는 그런 단순한 사실을,
실제로 그것이 '진리' 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실을

고찰과 성찰 없이
알고 있다는 것에 멈춘다.

하지만, 익히 알고 있듯이
학문으로서 제시된 이론들은
대개 '진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이기 보다는
학자들 사이에서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배움이 아니다.

어떠한 사실로 부터
'왜' 그렇게 도출되었는지가 제일 중요하며,

그런 '왜'로 부터
그런 사실의 오류가 존재한다면,

반대론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반대론을 피력하고, 옹호하여

비판받고, 고찰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의견을 견고히 하여
다른 사람들을 동의시킴으로써

이전 보다 좀 더 '진리'에 가까운
'부분적 진리'를 도출해야만
어떠한 사실로 부터 배웠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야만 좀 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교육에서 이러한 것들은 배제되어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the people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아졌지만,
the people들에게 허용된 시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the people들의 한 구성원으로서
꼭 교육해야만 하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어떠한 사실이나 지식에 대해
'왜'라는 의문점을 가져야하고
그것을 씹고 뜯어보며 해체하여,

그런 사실에 의의가 있다면
반대론을 제시하고, 이런 반대론을 피력하여

자신의 반대론을 옹호하고
다른 사람들로 부터 자신의 의견을 비판받아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통해
고찰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논지를 좀 더 강화해 나가면서

그러한 사실에 좀 더 '진리'에 가까운
'부분적 진리'를 발견해내는

이 과정을 교육해야만 한다고 생각 한다.

물론 교육도 있겠지만

더 큰 문제점은
그런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롭게 정치 토론과 회의 등을 할 수 있었고,

대표자들, 의회의 통치발언을 들을 수 있었던
공간이 현대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느나

나는 그에 이유에 대해
현대인들이 자랑하는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그런 공간이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유용하지 않다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주변에 그런 공간은 존재 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이러한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고 언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공론화 되지 않는 것을 보면

현대 자유 민주주의 라는 이념에서
이런 광장이라는 공간은
그리 유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사실 이다.

이런 광장이 중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국가(도시)들에는
각각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하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정말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이러한 분위기가 관습으로 굳혀진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다양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논의하여 

다양한 논제에 대해 그리고 지금껏 
'진리'로 판명난 논제들 까지도 좀 더 다듬을 수 있을 것이며
좀 더 '진리'에 근접할 수 있을 것 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에서
이런 광장이라는 공간을 매우 중요시 했음에도

왜 현대인들이 자랑하는 자유 민주주의는
광장이라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단순히 나만의 착각일까?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에서는 아고라(Agora),
고대 로마의 「공화정」에서는 포룸(Forum)이 있었지만

현대인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현대 자유 민주주의에는
그런 분위기의 공간이 있는가?

만약 그런 분위기의 공간이 존재하는 나라가 있다면,
내가 죽기 전까지 그런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

아마 대신할 수 있는 공간은
인터넷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인터넷은 익명이라는 것과
말이 아니라 글로써만 표출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 부터 호응력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

이렇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고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요시 하던
광장과 유사한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광장을 대신할 수는 없다.

밀의 자유론에서 근대의 교육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보면
아마 현대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근대인의 자손인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이를 옹호하여

비판받으며, 고찰과 성찰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견고히 한다는 것은 매우 낯설다.

이런 과정 중 현대인들에게 그나마 익숙하다고 하다면
아마 자신 의견을 피력하고,

이를 옹호하는 것 까지는 익숙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밀의 제시한 '자유'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자유'에 의해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하
입헌 군주제가 정당화 되었기에

the people들의 요소인
각 개인들이 의견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비판은 불쾌한 것이며,
고찰과 성찰은 복잡하고, 번거로우며,
굳이 필요없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있기 때문에

각 개인들에게는 굉장히 낯설게 다가온다.

또한 사회내에 금기시되어 있는 의견에 대해서는
이런 '자유'를 믿으며
(물론 나는 그들이 정말
밀이 제시한 '자유'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결코 언급할 수 없다.

어떤 한 개인이 그러한 것에 언급하게 된다면,
개인은 많은 사람들로 부터 비
난이란 돌을 맞게될 것이며,
눈초리라는 철퇴를 맞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비판을 받게 된다면,
더 나아가
금기시되어 있는 의견에 비판 받게 된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비난으로 오해해
경우에 따라서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심지어 욕을 하여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닌,
저열하고 비열한 온갖 언어를 섞어가며
상대를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한다.

그런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
현대인들은 대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듯이 생각을 하며

그렇기에 현대인들에게 비판은
자제해야하는 분위기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으로서의,
the people들 중의 하나인
우리에게 '협력'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여서,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있는
그러한 비판은 되도록 자제해야
우리가 서로 협력을 할 수 있으며,
좀 더 원활하게 협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the people들에게는 필수적인 능력으로 인식되어져 있고,
이는 외향적인 성격을 가져야한다는
의식주와 같은 필수품으로서 함양되어야 한다고 요구되어지고,
요구되어져 왔다.

따라서 the people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옹호하는 것은 낯설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받고,
이에 고찰하여 성찰하여
자신의 의견을 옹호함에 따라

좀 더 '진리'에 가까워지는 이런 것에 대해
굉장히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아마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한계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인간'의 한계이며,
이에 대해 입뻥긋하지 않는
현대인들인 the people들의 과오이리라 생각된다.

우리들 이기도한
the people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라왔고

우리의 생각보다 
우리는 단순히 지식을 알고만있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오만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나마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약 2000년 동안 
우리의 선조도 그들의 후손인 우리도
인류는 바뀌었던 적이 없다.

과거에는 국가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그리고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온갖 치졸한 짓을 해왔다.

그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강력하게 결합되어져 있는
자본・민주주의에 사로잡혀서 
과거의 선조들이 국가를 신봉하듯이
우리는 자본・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이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우리가 공기를 마시듯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주의에 이름하에 
다양한 민주주의가 나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쟁을 하고 있다.

물론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지만
경제라는 게임판에서 싸우고 있다.

과거 선조들은 국가의 넓이에 따라
강・소국이 나뉘어졌다.

물론 근대에 들어서는 애덤 스미스에 의해 
국부라는 것에 대해 재정의가 이루어져 있지만
대략 2000년 역사를 살펴보면 애덤 스미스에 의해
재정의되어진 국부는 비교적 최근이다.

따라서 근 현대에 들어서 산업혁명의 발달로 인해
그리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의 재정의를 시작으로
국부에 대해 재정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현재의 국부는 국가의 땅이 아닌 
대체적으로 GDP라는 
특정 기간(대부분 1년) 동안 
그 나라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시장가치를
금전적으로 측정한 것을 말한다. 

물론 GDP라는 것도 도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지 않은 등의
여러 제약도 있지만
국제 시장에서 국가 경제를 비교할 때 다른 것보다 유용하기 때문에
GDP를 향상시킨다는 것은 국가의 힘을 나타난다.

신자들이 그들의 신을 의심치 않듯이 
우리는 우리들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의심치 않는다.

일부 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정말 보기 드물다.

이 중 자본주의는 둘째 치더라도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신자로서

그리고 그러한 틀 안에서 살고 있는 the people들 에게
그리고 the people들에게 힘이 주어진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에서

The people만이 책임감에서 자유롭다는 그러한 인식이
나는 마냥 유쾌하지는 않다.

물론 어떠한 사람들은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며 어쩔수 없다는 태도를 취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the people들이라면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러한 현실에 대해 채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좀 더 이야기하고 공론화 해서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야 된다.

채념을 한다는 것은 옛것에 새것을 더한다는 의미의 
'진보'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진보'를 포기한 the people들에게 
더 나은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동일하게 '진보'를 포기하는 the people들에게 
더 나은 민주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정치와 연결고리가 끊어진 The people


이런 The people들의 문제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정치와 The people들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이것을 대신해줄 단체는
비정부단체(non-governmental organization, NGO)라고 
부를 수 있겠으나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The people들의 목소리를 대신 해주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이기에 NGO는 범위가 너무 넓다.

따라서 새로운 단어를 정의해야 이야기에 앞서
조금 인식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정치라는 단어의 Politics,
그리고 The People
마지막으로 단체라는 단어의 Organization를 적절히 합쳐서

Politics Organizetion of The People이라 정의하고
줄여서 POTP라고 제안하겠다.

앞으로 이런 The People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줄 단체를
POTP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이제 정의도 해봤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이야기에 앞서서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할법한 말인
"현실은 어쩔 수 없다"라는 변명을 

내 스스로 해야할 상황이 왔다는 사실에 
정말 통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The People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맡고 있는 
역할을 직업을 가지는 것을 통해 역할을 다해야만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시간적인 그리고 
사회의 인식이라는 관념 때문에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생각 자체를 안 하는 사람들은
앞서서 이야기 했듯이 

각 개인이 목소리를 가지고 힘을 가지는
민주주의를 외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도 충분히 언급했다고 생각하기에
이후 언급하지는 않겠다.

어쨋든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에서 
국가 최고 권력 단체인 정부의 팔다리를 자른 것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이런 정부와 The People들 사이의 
거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따라서 그러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그 갭의 사이에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

음식점과 고객의 거리를 줄여준 
배달 중계 회사 Uber Eats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현대 민주주의에서 
스스로 이런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단체는 있지만
정확히 The People의 말을 대신해 줄 단체는 없다.

또한
우리는 이런 말을 대신해 줄 사람으로서 
정치인들이 그런 말을 대신 해줘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정치인들이 그런 말을 해줘야 한다는 인식은
잘못되었다고 생각 한다.

정확히는 현실과 맞지 않다.

정치인들은 The People들과의 관점이 다르다.

정치인들은 크게 국가 관점에서 '진보'를 생각하지만
The People들은 The People들의 '진보'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은 대개 국가 관점에서 미래를 위한 
출산률, 경제 등의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그것을 하려 하기를 원하지만,

The People들은 대개 The People들 자신의 관점에서
법, 국내 시스템 등의 The People들의 생활과 관련된
좀 더 나아가면 그러한 시스템
즉, 좀 더 미시적 관점에서 생각하며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The People들의 말을 대신해줘야 한다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또한 현실과 맞지 않다.

이런 관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POTP에 The People들 이외의 
자금이 흘러들어가서는 안되며

특히 국가, 기업의 자금이 흘러들어서는 더더욱 안된다.

왜냐하면 기부로서 움직이는 단체에게
자금줄이 끊긴다는 것은 단체의 운용이 불가하기에
국가나 기업의 지원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나 기업이 원하는 말을 대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The People들의 기부로서 움직이고
The People들이 이상과 
목소리를 대신 해줄 POTP가 필요하다.

이 POTP는 자신들의 이상을 The People들에게 말해
운용 자금을 얻고
그의 댓가로 The People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줘야 한다.

그리고 대신 내주고 효과로 나타난다면
해당 POTP단체는 인지도가 상승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The People들에게 자신들의 이미지를 각인 시킬 것이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그 단체는 정치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된다면
자연스럽게 POTP단체는 정당이 될 수 있고
그들의 The People의 후원자들은 지지자들이 될 수 있다.

이는 The People이나 POTP단체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한 사실상 고여버린 정치계에 
새로운 활력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The People들에게는 이러한 것을
투표권 처럼 강제하더라도 의무로서
스스로 선택하고, 후원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The People들의 끊어진 정치와의 
연결고리를 과거 보다 단단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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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초기문 작성 및 개행, 분류 완료.
2020.05.27 본문 다듬기 및 수정, 내용 추가
2020.06.01 「정치와 연결고리가 끊어진 The People」 내용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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