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1에 이어서 논의를 해보려고 한다.
이번 논의는 '청소년 툰베리'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것을 외치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마지막 결론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청소년 툰베리'가 가지는 영향력은
어떤 것을 사회에 외치고 있는가
나의 논지에 어느정도 동의한다면,
우리는 다음 논지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툰베리'가 가지고 있는 강대한 영향력과
이를 지지하고 있는 세력들이 많다는 사실이
사회에 어떤 것을 외치고 있고, 이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다.
이는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음을
사회에 외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괜찮은 교육을 받고 있으며,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현재 우리들의 '우리'는
이런 '어른'만이 포함되어있지만,
경계선이 무너진다면
더 이상 '어른'만이 아니라
'우리'에 '청소년'도 포함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른'들은 '청소년'보다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며,
사람을 속이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청소년'들과 크게 다를바가 없는 '어른'들이
왜 '청소년'들에게 제약을 가하는 사람으로서
있다는 것이 정당하며,
그리고 왜 그것이 자연스럽게 관습으로서 자리잡았는가
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런 논의를 제쳐두더라도
나는 단순하게 나이로서
'어른'과 '청소년'을 나누는 관습에 대해
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이와 유사한 문제로
한국의 나이 문화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로 항상 의문이 간다.
과거의 한국의 조상들 마저
나이가 많건, 적건
마음만 맞다면
흔히 말하는 친구처럼 지냈고,
또한 유교의 가르침 중
나이로 위,아래로 나누는
그런 것이 아니었음에도
삼강오륜의 오륜 중 하나인
장유유서가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라는 의미가 '나이'로 어른과 아이로 나눈 의미가 아니였음에도
나는 과거에 나이로 위아래를 나누는 이런 문화는
유교에서 비롯된 유교의 잔재의 탓이며
이런 유교의 가르침 중,
장유유서가 원인이라며,
한국이 이런 문화를 가지게된 원인으로서
이런 유교적 잔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교육 받았다.
그리고 누구도 이에 의문점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외국에서 일하고 살며,
그 속에서 다양한 성찰과 고찰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이런 것을 깨달은 이후로
내가 한국에서 받은 교육에 대해
의심해 볼 수 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장유유서에 대한 말은
사회윤리가 아닌,
가족윤리에 해당하는 것이였고,
나이로 서열을 가르는 것은
유교 탓이 아니였음을
그리고 내가 교육받은 것은 거짓임을 결론 내렸다.
과거 한국에는 나이가 아닌
족보의 항렬로 위치가 정해졌다.
따라서 자신 보다 나이 어린 삼촌과 같은 부류는
한국에서 낯선것은 아니였다.
나이로 위치가 정해졌다면,
이는 이상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교육받은 것 처럼
'나이 문화'가 유교의 장유유서에서 비롯되었다면,
자신 보다 나이 어린 삼촌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에 따라
나는 내가 받았던 수 많은 교육들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내가 한국에서 받았던 교육이
모두 그러하다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틀릴 가능성이 있는 이상
나는 마냥 믿을 수는 없게 되었다.
아마 이런 것에 대한 것도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유가 타당하다고 한들
그런 거짓된 교육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전에는
그래도 동양에는 서양보다 비교적
'예'가 있고, '의'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도 동양의 정체성에 대해
나름의 '예'와 '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모국이 그런 행위를 한 것에 대해
나의 그런 믿음이 깨져버렸다.
어쨋든 이런 한탄에 대해서는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런것들이 발생한 이유
정확히는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이유는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이전에는 '만 19세'라는 규정하에
적절한 교육 과정을 거침에 따라
나이가 차면 사회에서 한 사람으로써
살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고 허락했다는 증거로
'어른'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았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지식을 얻을 수도 있고,
얻은 지식을 공유할 수도 있고,
의견을 나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글로 부터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가능해지면서,
더 이상 적절한 교육을
학교에서 받을 필요는 없다.
현재 학교 시스템은 세계의 패러다임을 쫓아가기에는
재빠르지 못하며, 심지어 너무 늦다.
오히려 100년이라는 긴 인생에서
한 공간에 갖혀서 지식을 쑤셔넣는데 열중하는 것 보다
가능하다면 현실에서,
여의치 못하다면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논의하고 비판받으며, 성찰하고 고찰하는 것이
더욱 유용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런 익명의 공간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있을 뿐,
나이에 의한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는
원래부터 없었다.
따라서 이런 인터넷에 익숙한
현대의 '청소년'들은
과거 '어른'들만이 가졌던 것들 혹은
그에 유사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터넷의 발달과 보급률이 늘어나면서,
지식은 더 이상 '어른'들의 것 만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른'들이 관습에 얽메여 '토론'을 멀리 할때,
'청소년'들은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가지며
때로는 '청소년'들과 때로는 자칭 '어른'들과
논의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어른'들 보다
뛰어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청소년'이다.
나는 가끔 그들의 글로 생각을 엿보면
배우는 점이 많다.
그들의 시각은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주기 때문이다.
역으로 나는 그가 좀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인 줄 안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자칭 '어른'들은
자신들 또한 불안정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을 불안정한 존재로 낙인 찍어버리고,
어리다는 이유로 그들의 말을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른'은 안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과 감정을 잘 컨트롤 할 수 있지만
'청소년'들은 불안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과 감정을 잘 컨트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믿음은
마치 종교계에서 자신들의 유일신을 의심치 않는 것처럼
그러한 의견에 대해 그와 유사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버릴 생각이 없는듯 하다.
하지만,
'어른'이 안정적인 존재라고 하기에는
'어른'들도 그들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도둑질을 하기도,
사람을 속이기도,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로 '어른'들도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이성과 감성을 잘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에 어떤 사람은 그래도 비교적 '어른'들은
이성과 감성을 잘 컨트롤 할 수 있다며
어깨를 으쓱할지는 모르겠으나
어른들 모두가 그렇지 않으며,
어른들도 '이성'과 '감성'을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없는 이상
더 나은 존재라고 할 수 있으나,
우월한 존재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만만하게 그런말을 하는
자칭 '어른'들의 그 길은 대개 올바른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왜 올바른 길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내가 그렇게 해서 어떤 성공을 이루었다는
자랑만 할 뿐이지,
정작 그 길을 억지로 강요받는
'청소년'들에게는 납득이 안된다.
현대와서는 과거보다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그들의 '개인적 경험'은 믿고 따르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크다.
만약 대답을 해준다면,
그 길은 올바른 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충분히 납득가능한 이유라면,
그 길을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올바른 길이라면,
그 '어른'은 그의 말에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에 따른 '청소년'이 '어른'의 말을 믿고
올바른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길을 억지로 가게 했다면,
그의 책임의 대부분은 '청소년'이 아니라 '어른'에게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그에 책임지는 '어른'들이 있는가?
책임을 지기는 커녕
과거 '청소년'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 않은가?
대개 그런 '어른'들은 나몰라라 하면서
비난할 뿐이지 책임감이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어른'들이 의심받을 이유는 충분하며,
'청소년'들에게 길을 제시할 경우
그들은 납득할 만큼 설명해주어야 한다.
과거에도 그랫듯이
이런것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 소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칭 '어른'들은 자신들이 그 극 소수에 있음에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며,
그렇기에 '청소년'들은 '어른'인 나의 말을 따라야하며,
이런 사실에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잘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요소 중
'나이'라는 요소가 있음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나이'가 가장 큰 이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이'가 그 정도로 큰 요소라면,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모두 '현자' 였어야 하며,
한국 사회에 '꼰대'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 한국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대로
'한국의 나이 문화는
유교의 장유유서에서 비롯된 유교의 잔재다'
라고 말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의 항렬이라는 문화를 보면
전혀 그렇치않음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어쨋든 이런 상황에서
어째서 '청소년'만이
그런 가혹한 제약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왜 납득할 수 없는 '어른'들의 말을 따라야하는가?
'청소년'이 이런 가혹한 제약을 받아야 한다면,
불안정한 '어른'들 또한 가혹한 제약을 받아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의 논지에
자칭 '어른'들은 인정하기 싫다는 듯이
자신의 태도를 유지하겠지만,
만약 거대한 파도가 다가온다면
그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마지 못해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성찰과 고찰없이,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며 넘어갈 것 이다.
어쨋든 이에 대해 어느정도 수긍한다면
우리가 다음으로 논해야하는 것은
아마 여러가지가 존재할 것이다.
불안정한 '청소년'에 대한 인식은 물론이고,
이에 제약을 가했던 것들인 술, 담배 등의 문제,
그리고 결정적으로 '청소년'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져야 하는가?
이에 좀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질려면
'청소년'들도 그에 알맞은 의무를 지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는 엄밀히 말하면 공짜란 없다.
국가가 그 안에 있는 개인들에게
부여하는 의무들을 수행함으로써
각 개인들은 국가안에서 먼저 의무를 행한 보상으로서
어떤 권리를 부여받는다.
이런 국가의 의무 중,
가장 중요시되는 의무는 '납세의 의무'이다.
우리는 이런 납세의 의무를 지니며
의무를 행한 권리로써,
우리는 그 나라로부터 최소한의 복지를 받을 권리를 행할 수 있으며,
또한 이에 요구할 권리를 행할 수 있다.
이런 개인들의 의무를 행함으로써
이에 국가는 응할 의무를 지닌다.
이에 국가는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하고,
각 개인들은 사회의 안전망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아
사회로 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
물론 이런 권리는 개인이 국가가 구축한 사회의 안전망에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무를 행하지 않거나,
어떤 이유에 의해 의무를 행할 수 없게 될 경우,
국가가 그런 개인에게 권리를 부여할 의무는 없을 것 이다.
따라서 그런 자들에게 '접속'할 권리를 박탈한다고 하더라도
정당하리라 생각한다.
이쯤 되면 예상되는 반대론은 뻔할 것이다.
나는 '청소년'들이 어떤 의무도 없이
그런 제약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무를 주고,
그에 알맞는 대우를 해주는것이 옳으며,
그것이 정당하다.
'어른'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청소년'들이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도 한 '개인'으로서 다루어져야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그들의 말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된다.
'어른'들이 불안정한 존재인 이상
'어른'들이 말하는 의견은 대개 '진리'는 아니며,
'부분적 진리'에 가깝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펼치는 반대론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가지는 직감에 대해,
'어른'들이 이야기를 듣고 논의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으며,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할 필요가 있다.
현재 자칭 '어른'들의 행위는
밀이 말한 '자유'에 위반 된다.
따라서 이런 나의 논지에 동의 한다면
우리는 여러가지 논의를 해봐야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른'들과 동일하게 '청소년'들 또한 가장 중요한 의무인
세금을 내야하는가?
만약, 세금을 낼 수 없다면,
어떤 의무를 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대해 나의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사회 구성원들간의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므로
이런 구성원들의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고
의논하여,
최대한 다수가 납득 할 수 있게
나를 포함한 구성원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결론
따라서 나는 <툰베리가 주목받는 것에 대해
사회가 무엇을 외치고 있는가>에 대한 결론으로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라고
결론 짓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에 좀 더 나아가면,
이런 경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앞으로 나올 툰베리와 같은 '청소년'들이
어른들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토론장에서 만나 토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그리고 이것이 당연시되어지는 날이 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만 19세라는 나이가 좀 더 줄어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납득 할 만한 '진보'일 것이다.
강력한 지진 후에
거대한 파도인 쓰나미가 오듯이
'청소년 툰베리'를 통해 나타나는 사회의 외침이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거대한 파도가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강하다고,
그리고 약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지진에 대해
우리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대비하고 있는가?라며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고 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대비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어른'들은 그런 것 보다
'자본'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는 지금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종식 시킬 백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나타날 부정적인 경제 영향과
이로 나타나는 '시장'의 변화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미국의 금리 대책을 비롯한
경제 대책 발표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이럼에도 '청소년'을 불안정한 존재로 낙인 찍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로서
'어른'들이 그의 역할을 맡는것이,
그리고 당당하게 그들이 불안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그런 인식이 과연 정당하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자신들의 길도 제대로 못 걸으면서
누가 누굴 인도한다는 것인가?
따라서 실제 '청소년'에 대한 것들이,
좀 더 정확히 말해 '나이'에 관한 어떤 것이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이름의 큰 파도로 다가온다면,
우리가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고,
재빠르게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쓰나미와 같은 그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해
이미 우리가 '여성'에 관한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재빨리 대응하지 못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하에
급진적인 세력에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듯이,
'나이'에 대한 것으로 인해
'청소년'들이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로
사회적인 위치를 가지는 상황이 온다면,
마찬가지로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노파심에서
나오는 것일지는 모르겠다.
노파심에서 끝난다면, 천만다행이다.
우리가 '옛것에 새것을 얹는다'는 의미에서
'진보'하려할 때,
그것이 방해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면,
우리는 또 다시 급진적인 세력에 의해
'진보'가 느춰질 수 밖에 없으며,
이에 얼마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할지 알 수 없다.
물론 나의 논지에는 논리적 허점이 존재할 수 있음은
인정하는 바이다.
따라서 '청소년 툰베리'의 영향력이 사회가 외치고 있는 것이
나의 논지대로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며
확신하기에는 힘들 것이라는
반대론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인정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논의로서
툰베리가 주목받는 것에 대해
우리가 깊히 논의 해봐야한다는 것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증명했다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