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이미지
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생각 ]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위화감을 느낀 적이 있는가?

아마 크게 느끼지 못할 것 이다.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 특성 상 더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국가를 부를 때 매우 당연하게도
'우리'나라라고 부르기 때문이고
실제 생활에서도 우리라는 단어는 
우리 반, 우리 집, 우리 회사, 우리 사회 등 
꽤나 쉽게 사용 되기 때문이다.

즉, 적어도 한국에서는 
우리라는 단어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다만 문제는 
사회 문제가 이러한 단어의 경계가 
모호함에 따라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단어의 경계가 모호하니 
사회에서 정말 가치가 큰 것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배려, 혁신, 용서, 나눔, 정의 등이 이러한 처지에 놓여있다.

이미 몇 가지는 찬란했던 빛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 했던 배려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배려란 쉽게 할 수 없는 행위이다.

애초에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진정한 배려란
쉽게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배려가 일상 생활에서 쉽게 나온다고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갑자기 현대에 들어와서 인류가 
배려심이 넘쳐흐르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근거를 찾기가 매우 힘들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배려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향해 박수를 치거나
마음속으로 경외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가 아픈 노인이나 임산부는 물론이고
몸이 편치 않아 보이는 남성 까지 
누가 봐도 불편한 기색이 보이는 사람에게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선뜻 자신이 앉고 있는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이런 배려에 속 한다.

물론 비교적 과거에는 말이다.

또한 전제 조건은 
주변의 눈치를 살펴서 행동하거나
그러한 문화가 있지 않는 조건 하에서 이다.

만약에 다수의 사람이 눈치를 주거나 
사회 문화에 의해 혹은 
긴 시간 동안 주입에 의해 
마지 못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배려가 아닌 관습에 가깝다.

흔히, 한국을 제외하더라도 많은 문화권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 이러한 관습이다.

과거 배려에 속해있던 인사말이 
어떠한 이유에서 관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안녕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인사를 하며
만약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눈초리를 받게 될 것이다.

이는 이러한 행동이 
사회에서의 암묵적인 룰,
관습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사가 배려였던 시절에는
눈초리를 받기는 커녕 
인사를 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마음속에 어떠한 경외심을 품었을 것이다.

그때는 당연한 것이 아니 였기 때문이다.

아마 귀족들의 문화가 아니 였을까 싶다.

즉, 이러한 관습이 존재하지 않는 가정 하에서
이러한 진정한 배려는 가장 빛이 나며, 
가장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단어가 가지고 있는 힘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 배려였던 행위가 
관습으로 내려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배려라는 언어의 카테고리에 포함되면서 
새로 나타나는 배려가

그리고 역으로 
일반적으로 쉽게 할 수 없는 배려를 
억지로 관습으로 끌고 내려버린다면 
그 가치를 잃어 버린다.

왜냐하면 배려와 관습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그 가치 또한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배려가 관습의 경계에 머물면서
진정한 배려가 점점 빛을 잃고 
점점 희미해지며 결국에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진정한 배려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나
진정한 배려를 함으로써 나오는 사이드 이펙트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배려를 하게 만든다.

바로 자긍심이라는 것 이다.

비록 이런 자긍심이라는 것이 
자긍심을 가져본적도 
심지어 느껴본적도 없는 사람에 의해 
언급되어지고 사용되어지는 것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자발적으로 나온 행동에 의해 산출된
자긍심은 분명 큰 만족감을 주는데는 
의심에 여지가 없다.

내가 만약 길을 가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한다고 한다면 
이는 마음 한 구석에 자긍심에 가까운 어떠한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저울질을 하게 되어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논지에 대해 어떤 사람은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보상들은 분명 큰 역할을 한다.

지금이야 자본(혹은 돈)이 
이 역할을 대신 하고 있지만
왕정 시대에는 명예가 이를 대신했으니 말이다.

명예를 위해 목숨 조차 걸었던 시대가 아니 였나?

그 누구도 앞서 나가려하지 않는 전쟁 속에서
나라를 위해 전쟁에서 용감하게 돌진해 
승리를 쟁취한 전쟁 영웅이라는 명예는
현 시대에서 본다면 멍청하고, 
바보같은 짓일지는 몰라도
분명 그 시대에 가장 큰 가치 였을 것 이다.

이러한 행동의 뿌리가 단순히 
자신의 사욕을 위해 명예를 얻으려 했던 
스스로의 자긍심에 의해서 였던 간에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사욕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행동이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행동이기에
박수 받아야 하며
동일하게 자긍심에 의해서라면 여기에 더해 
찬사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어떠한 사람이 자신의 평판을 얻기 위해 
혹은 유지하기 위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박수를 받을 만한 행동이며,

만약 자긍심을 얻어 내기 위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했다면
찬사를 받을 만한 행동이다.

물론 이런 사실에 의해  
일반적으로 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도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
속내야 어찌 되었든 대외적으로 같은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면,

즉,  
평판을 얻기 위해 사람을 구했던
위에서 이야기하는 자긍심 혹은 그에 가까운
어떠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했던
결과적으로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면

자긍심이라는 것에 대한 가치가 
마땅히 받아야만 할 본래의 가치보다 
상대적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재평가 받아야 한다는 새로운 논의해야만 하는  
것이 나타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어쨋든 이러한 가치가 큰 것들은
규모가 적으면 적을 수록 
경계가 모호해도 비교적 큰 문제가 없지만

규모가 크면 클 수록 
(이런 의미에서 우리라는 단어는 
모호함의 정도가 크기 때문에 매우 규모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가 바라보는 가장 큰 가치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도 늘어나기 때문에 
이로 부터 나타나는 사이드 이펙트가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공동체의 힘이 강하면 강할 수록 
가치에 동조하지 않는 내부의 소수 커뮤니티는 
수가 많은 동조하는 공동체로 부터 
자신 혹은 속해 있는 커뮤니티를 지키기 위해 
(이는 정말 커뮤니티를 위함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보호해줄 커뮤니티의 존속을 위함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의 꿈꾸거나 따르는 가치에 대해 
동조하는 척을 하거나
반대로 이득을 위해 이를 이용한다.

따라서 가장 최상위 공동체에 
하위 모든 공동체의 가치가 종속되어 묶여버리고
유연함을 잃어버린다. 

결국 가장 최상위 공동체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며
대게 밀이 이야기한 자유는 매우 제한 된다.

물론 최상위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은 
손 사례를 치며 부정하고 싶겠지만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개인 혹은 단체는
대게 폭군으로 강림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성군이 칭송받는 이유는
인류의 기록이 남겨져 있는 약 2천년 동안에서도
매우 드물기 때문에 칭송받는 것이다.

왜 인류의 역사는 왕정을 해체하였을까?

그리고 왜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공화정이 아니라 민주주의로 방향을 바꿔 나아갔을까? 

어떤 사람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투표를 가지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평균에도 못 미치는 멍청한 국민들이
(자신을 제외하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장기적인 관점 보다 단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며
정책의 합리성이나 질 보다는 
학교 반장 선거 처럼 인기 투표 처럼 진행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큰 가치는 
국민들에 의해 대표가 정해지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이는 한 가지 요소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큰 가치는 '견제'에 있다.

인기 투표건 뭐건 간에 그 누구도 
가장 큰 권력을 가지는 대표자 자리에 
쉽게 올라서지 못하게 투표로 견제하며

입법부, 행정부, 법무부로 분리 및 독립하여
견제 및 권력을 약화시키며

선출된 대표자가 쉽게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행동하지 못하도록 견제 하게하는 것이
(한국의 경우 시민 단체가 국가의 보조금을 받으며 운영되면서 
시민 단체라기 보다는 정부를 위한 혹은 
국가 기관을 위한 정치 단체가 되어버렸다. )

즉, 민주주의에 대의는 견제라는 것이며
인기 투표로 대표자가 선출 되는 
리스크가 있다 하더라도 
한 명의 폭군이 나오는 것을 막겠다는 것 이다.

공동체 또한 이러한 폭군이 될 수 있다.
오히려 한 명의 폭군 보다 매우 질이 나쁜데

각 구성원들이 도덕적 리스크를 분산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즉, 윤리적 의미에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나타나기 때문에 
한 명의 폭군 보다 규모가 크면 클 수록 사회에 매우 치명적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폭군은 
이러한 도덕적 해이를 공동체의 존속 위해 혹은 
다른 공동체에 명분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공동체를 
견제할 수 없는 수단이 없는 이상
늦던 빠르던 부패하게 되어 있다.

물론 스스로가 자신을 그럴리 없다며 
이야기할 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구 인류는 
여러가지 유혹에 빠지기 매우 쉬우며 
이는 지금 까지의 역사가 증명해왔다.

재미있는 점은 한 명의 폭군이 나타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는
역사에 의해 증명되었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한 명의 폭군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경계하는 반면에 

공동체의 폭군에 대해서는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이던 공동체던 폭군인데에는 변함 없는데도 말이다.

민주주의 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이라는 것은 
매우 당연하게도 강조되기 때문에 비교적 견제가 쉽지만

공동체의 경우는 모럴해저드가 나타나기가 
매우 쉽기 때문에 질이 가장 나쁘다.

그나마 잘 나타나는 부분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부의 삼권 분립과 
기업의 독과점 방지 뿐인듯으로 보인다.

어째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는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정부와 기업에게는 강력하고 치명적인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The People들에게 이러한 장치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업과 정부, 특히 정치인들은  
이 점을 파악하고 집요하게 공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꽤나 효과를 보이는 듯 하다.

어쨋든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
현대에서 이야기하는 영웅 그리고 
현대의 판타지 세계에서 이야기하는 용사는 
역사에서도 증명하듯이 
지금 까지도 손에 꼽으며 
이러한 호칭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 아닌
수 많은 사람에 의해 평가되어지고 부여 받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가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철인이거나 용사라고 생각 된다면
스스로를 매우 과대 평과하고 있으며
자기 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신 인류가 아니라면 말이다. 

따라서 이는 자유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를 야기하는 이유야 여러가지를 제시해볼 수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위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단어 정의에 경계의 모호함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런 모호함을 이용해 
누군가는 여러가지 이유로 
알게 모르게 이득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의에 모호함은
사회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해 나타난다.

돈 뿐만아니라 명예, 사회적 위치를 얻기 위해
혹은 명예나 사회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 
이러한 모호함을 이용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서 칼이나 총을 들거나 
주먹으로 결투를 하는 행위는
이미 비상식적이며 

자신의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인 위치로서도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모호함을 이용하는 것이 
리스크도 적으며 체면도 세울 수 있는 
이 방법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스스로 어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반목한 것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나도 애매모호 했으며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듣기가 매우 힘들 뿐더러 
마치 연기가 익숙치 않는 배우들이 
대본을 그대로 읽는 것 처럼 
항상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대화의 끝은 
언제나 어른에게 대들었다는 말과 함께
이유 없는 윽박을 당할 뿐이였다.

나는 그 이후로 더 이상 
내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의문에 대해 
누군가에게 묻는 것을 포기했고 
때로는 강력하게 무시 했으며
대신 내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지금에 와서 그 일부를 손에 넣었다.

어쨋든 이런 모호함을 
아주 잘 활용하는 곳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책일 것이다.

흔히 책을 보면 작가는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을 논리로서 납득시키려 한다.

그리고 이 또한 빼 먹지 않고 사용하는데
바로 우리라는 단어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하건 그럴싸한 이야기던간에 
논리로서 시작하고 이에 어느 정도 동조하게 되었을 때

우리라는 단어를 쓰며 
작가인 자신과 독자인 상대가 
서로 의견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동조하도록 만든다.

이는 그 어떠한 논리보다 강력한 단어이다.

작가가 어느 정도 권위가 있으면 있을 수록
이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이러한 방법은 자신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들 마저
아웃 소싱을 하려 하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이 효과는 배가 된다.

권위에 올라타는 것 처럼 
이 세상에 쉬운 것 또한 없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큰 리스크는 없다.

그 주장에 올라탐으로써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기에 
작가의 책임으로 돌리기 매우 편하기 때문이다.

도의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있겠으나 그 뿐이다.

따라서 나는 작가가 우리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면 매우 경계하는 편이다.

내가 작가라면 나는 내 의견에 동조하기 보다는 
동조하지 않기를 원한다. 

내 생각을 포함한 나의 모든 의견이 
진리가 아님을 자부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은 그리고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은
밀이 이야기한 것 처럼 
서로 적절한 대화를 통해 모순을 찾아내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부분적 진리에 도달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의도적으로 작가가 우리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면서
동질화하려는 시도는 
사실 작가와 독자 둘 간의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둘 만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공동체가 된다면 매우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이야기 했듯이
공동체의 규모가 크면 클 수 록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방금 처음 본 타인에게 조차 
매우 쉽게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동질화 하려 시도 한다.

이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공동체(없더라도 그러한 시도를 하는)는
마치 우리는 두 팔 벌려 
당신을 환영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게 한다.
 
그리고 이에 홀려 그러한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면
대게 공동체의 실체를 보고 실망하게 되는데
이 경우 불만이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탈퇴하려 할 것이다.

적당히 이유를 둘러대며 조용히 탈퇴한다면
비교적 문제가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당신이 불만 사항이나 
문제점을 지적하게 된다면 
혹은 대외적으로 이를 알려 
공동체의 존속에 위협을 가한다면

경우에 따라 물리적으로 
대게는 정신적으로 철퇴를 날리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에 있어서 
당신은 공동체의 가치에 반하는 '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집을 나오거나, 
학교에서 나오거나 ,회사에서 나오게 되더라도 
인생의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속해 있던 
나라를 떠나고 싶다면 어떠한가?
학교를 나오거나 회사를 나오는 것 처럼
쉽게 선택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익 단체인 정치적 단체는 어떠한가?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면 
나라의 경제력과 상관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본에 상관없이
지금까지 구축해놨던 
물리적, 정신적인 인프라를 모두 버린다는 것 이다. 

당신이 익숙하게 다녔던 카페, 
언제나 일을 하며 농담을 주고 받던 동료,
언제든 연락만 하면 만날 수 있는 친구,
그리고 좋던 나쁘던 인생 절반의 삶을 공유했던 가족들 까지
사실상 모두 버려야만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새로운 터전에서 정착해야 할 때 나오는 
리스크 또한 감당해야 한다.

이 모든 리스크를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즉, 공동체의 규모가 크면 클 수록 
이런 정신적인 철퇴에 매우 쉽게 노출 된다.

그리고 이 큰 공동체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 
혹은 그의 추종자들 혹은 이들 밑에서 이득을 보려고 하는 자들은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으며 잘 활용하고 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라는 격언 말이다.

이 격언이 언제 사용되는지 잘 생각해보아라.

정신적인 철퇴가 아니더라도 
비교적인 물리적인 철퇴에 속하는 자본은 어떠한가?

당신의 모국은 당신 손에 들고 있는 자본을 
그대로 들고 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막을 것이다.

이 처럼 대체로 공동체는 폐쇠적인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어떤 이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 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사

그가 신 인류가 아니라면 
결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만약 공동체가 폐쇠적이지 않고 
당신을 환영한다면
 
이는 대게 당신을 정말로 환영하기 보다는 
공동체 스스로의 존속을 위함 이거나 
사기꾼 그것도 아니라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재미있게도
나는 약 10년전 우리라는 단어에 
무서움을 한번 크게 느낀 적이 있는데

대락 10년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당시 미국 대통령이였던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장면을 일부 보게 되었는데 

이런 저런 말을 하며 마지막에 한 마디에 
나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단어는 바로 'We go together.'라는 짦지만 힘찬 단어 였다. 

미국인도 아니 였던 내가 전율을 느낄 정도면
당사자들이 였던 미국인들은 오죽했겠는가.

당시에는 아무런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지만
꽤나 시간이 지나서야 무서움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더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누군가가 스스로의 의견을 강제적으로 관철하고
강제적으로 납득시켜 입 뻥긋 못하게 하기 위해 
이러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임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입을 막으려고 하는 대상(개인)을 자신 혹은 
자신 바운더리 내의 이익 단체에서 배제 당할 것임을 경고하면서 
불안에 떨게 할 것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상대방을 굴복하게 만드려 할 것이다.

물론 놀랄 것은 없다.

이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2차 세계 대전의 전범이라고 불리우는 
히틀러가 그리 했을 것이고 

현재에도 세계 정치에서도 비지니스 계에서도 
심지어 회사 내부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될 것이다.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나 또한 내 어린 시절 수 많은 어른들과 
반목하면서 이겨내야했던 시련이기도 했다.

한국은 스스로의 나라를 부를 때,
흔히 우리나라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우리'에 벗어나지 않게
얼마나 많은 눈치를 봐야하는지
한국의 문화를 면밀히 살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충분히 우리에서 제외될 법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나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한국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블로그 특성상 꽤나 폐쇠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여전히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대외적인 이미지가 중요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의해
물리적, 정신적인 철퇴가 가해 졌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글에서 
우리라는 말을 최대한 배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리하려고 한다.

앞으로 미래에 어떠한 이념이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을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적어도 민주주의라는 큰 개념 아래에 있는
개인주의 패러다임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판단은 
각 개인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

자유 의지가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그 판단이 옳건 그르건 

벽에 부딫치고 깨부수는 과정에 
상처를 입으며 시간에 거쳐 결국 회복하는 
이 과정이야 말로 
정말로 인간 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결과를 보고 인간을 판단하게 된다면
사실과 상관 없이 본질을 판단 할 수 없으며
인간을 판단할 수 없다면
수 많은 인간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 또한 판단 할 수 없을 것이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숫자로 적혀진 수치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미래, 비전, 인간, 사회 등을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멋들어지게 빗나갈 것 이다.

물론 결과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유용한 것을 창조 할 수가 없다.

즉, 그럴듯한 솔루션을 제시할 뿐 
유용한 솔루션을 제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듯한 솔루션으로는 현상을 규명하고 
이를 해결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놀이터에서 자신의 친구를 부르며 
뛰어다니는 저 꼬마아이도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칭하는 어른들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인간 다운 사람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 Web ] 웹 애플리케이션 아키텍처 (Web Application Architecture)

[ Web ] 서버 사이드(Sever Side) ? 클라이언트 사이드(Client Side)? 1 [서론, 클라이언트 사이드(Client Side)]

[ Web ] 웹 애플리케이션 서버 아키텍처의 정의 및 유형 ( Define and Types of Web Application Server Architectu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