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23의 게시물 표시

[ Essay - Technology ] 바이브 코딩의 허와 실

이미지
지금 우리는 가히 AI 시대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IT 업계에서 대다수의 작업량을 차지하는 프로그래밍의 영역에서 생성 AI를 이용한 생산성 향상의 가능성이 보이면서 어느 분야보다 가장 빠르게 괄목적인 성과를 이루고 있는듯 하다. 고작 몇 년전에는 커서에 의해 프로그래밍을 AI에게 프로그래밍을 위임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 어느정도 증명되면서, 작년에는 Claude Code의 영향으로 인해 이러한 이슈가 좀 더 가속화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굉장히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생성형 AI 솔루션의 발달은 개발자의 종말론을 더더욱 부각시키면서 업계 전반이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변화 속에서 “프로그래밍을 몰라도 생성형 AI만 있으면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힘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Saas 솔루션은 종말할 것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도 들리는 것으로 보면 소프트웨어 업계가 큰 격변의 시기가 온것임에는 틀림 없어 보인다. 허(虛):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환상 이런 상황에서 가장 주목받는 주장들은 서론에서 언급했다시피 ‘프로그래밍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성형AI를 이용하면 빠르게 제품을 개발이 가능하다’라는 주장이고, 실제로 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정말로 움직이는 결과물을 단 몇초 만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빠르게 제품 개발 가능하다’는 주장의 가장 큰 맹점이 있는데 개발자의 존재 이유가 단순한 제품이나 기능개발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AI를 통해 그럴듯 한 솔루션을 만들었다고 치자. 이것에 얼마만큼의 비지니스성과 지속가능성이 있을까? 예컨대 AI에게 넷플릭스나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같은 페이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면, 아마 실제로 그럴듯 하게 만들어 줄 것 이다. 이러한 인기 서비스들은 토이 프로젝트로 다루기 쉽고,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아 관련 자료를 찾기도 어렵지 않다. 코드 또한 깃허브에 충분...

[ Essay - Intuition ] 자유 의지란 존재하는가?

이미지
서론 자유 의지란 존재하는가? 매우 흥미로운 논의가 아닐 수 없다. 자유 의지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유 의지에 정의란 무엇인가? 이 대답에 평소대로  이전과 같이 옥스포드 사전의 사전적 의미부터 시작해  깎아내려가는 방식으로 할 수도 있으나  이번 만큼은  나의 정의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 만큼 사람에 따라 정의가 다른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나는 자유 의지에 정의에  크게 두 가지로 인식하고 있다. 첫 번째,  자유 의지에서 자유에 대한 강도가 높아 매우 순수해서 사회적인 패러다임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자유 의지 두 번째, 반대로 자유에 대한 강도를 낮춰서  사회적인 패러다임에 벗어 날 수는 없지만 그 내부에서에서 한정된 자유 의지 나는 전자라면 자유 의지란 존재할 수 없고  후자라면 자유 의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정의: 자유의 강도가 사회의 패러다임보다 높은 경우 아마 이 첫 번째 정의가 아마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자유 의지가 아닐까 싶다. 정말 순수하고 완벽한 자유 의지이다. 정말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만 이러한 자유 의지야 말로  세상 모든 사람이 가지고 싶어하는  보물과도 같은 물건이다. 모든 시스템에서, 모든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워  이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이다. 아마 자유라는 단어의 정의 중 가장 순수한 자유일 것 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성이 전혀 없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그것이 생존에 관련되었건 물질적인 이유가 되었건 유대감 등의 정서적인 이유가 되었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아이는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이의 자유 의지는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할 수 밖에 없고 원시적인 입장에서...

[ 생각 ]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미지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위화감을 느낀 적이 있는가? 아마 크게 느끼지 못할 것 이다.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 특성 상 더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국가를 부를 때 매우 당연하게도 '우리'나라라고 부르기 때문이고 실제 생활에서도 우리라는 단어는  우리 반, 우리 집, 우리 회사, 우리 사회 등  꽤나 쉽게 사용 되기 때문이다. 즉, 적어도 한국에서는  우리라는 단어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다만 문제는  사회 문제가 이러한 단어의 경계가  모호함에 따라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단어의 경계가 모호하니  사회에서 정말 가치가 큰 것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배려, 혁신, 용서, 나눔, 정의 등이 이러한 처지에 놓여있다. 이미 몇 가지는 찬란했던 빛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 했던 배려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배려란 쉽게 할 수 없는 행위이다. 애초에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진정한 배려란 쉽게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배려가 일상 생활에서 쉽게 나온다고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갑자기 현대에 들어와서 인류가  배려심이 넘쳐흐르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근거를 찾기가 매우 힘들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배려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향해 박수를 치거나 마음속으로 경외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가 아픈 노인이나 임산부는 물론이고 몸이 편치 않아 보이는 남성 까지  누가 봐도 불편한 기색이 보이는 사람에게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선뜻 자신이 앉고 있는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이런 배려에 속 한다. 물론 비교적 과거에는 말이다. 또한 전제 조건은  주변의 눈치를 살펴서 행동하거나 그러한 문화가 있지 않는 조건 하에서 이다. 만약에 다수의 사람이 눈치를 주거나  사회 문화에 의해 혹은  긴 시간 동안 주입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