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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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Essay - Intuition ] 직감 카테고리를 만들면서:사유와 직감 그리고 자유에 대해


오늘 이후로 블로그에는 새로운 에세이 카테고리인 
직감이라는 에세이 카테고리를 만들고 글을 작성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최근 과거 작성했던 에세이들을 보게 되었는데
etc에 있는 목록들은 따지고 보면 
어떤 개념에 대한 나의 직감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etc 목록에 있던 것들은 
당시 내가 에세이를 작성했을 당시에
명확히 분류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etc로 남겨 놨었다.

과거 etc 카테고리로 있던 것들이 아마 
이런 직감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갈 것 이다.

따라서 이런 목록들을 앞으로는 
직감(intuition)으로 묶도록 하겠다.

이 직감이라는 에세이에서는 어떠한 것들에 대한 
정의, 뜻, 개념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파헤쳐가면서 내 스스로 재정의 내리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과학을 통해
발달한 문명을 누릴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사회는 계속해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이에 따라 변화하고 있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처럼 문명은 계속해서 발달하고 진보를 넘어서 
혁명을 이루고 있으며, 
점점 기술적 혁명이 
그러니깐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지만 

인간 자체가 그 만큼 빠르게 
진보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이루고 있는 사회가 
진보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쌓아가면서 
이런 의구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사회가 어긋나고 비틀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외치는 것 처럼
문제는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고

사회라는 틀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다는
인간 성장(진보)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나 싶다.

물론 인간의 한계라며
지금 처럼 애써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무시한다고 해서 
문제 자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곪아 터지는 순간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어쨋든 이 에세이에서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개념들에 대해서는
여러 사전에서 정의하는 개념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직감에 대한 나의 정의는 
이전 포스팅한적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면 그쪽을 참고하길 바란다.

물론 이런 나의 논지에
니가 무슨 자격이 있느냐며,
니가 뭘 안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도대체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무슨 자격이 필요하고, 
앎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무슨 자격이 있기에, 뭘 알길래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진실된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대답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이 그리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앎이 무슨 소용이고,
자격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런 자격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누가 그 자격을 부여해 준다는 말인가?

자신만의 원석을 손에 쥐고,
고찰과 성찰의 과정을 거쳐 세공과정을 거친 다음
스스로 빛을 내기 위한 진리를 만들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가며, 비판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다
물론 자유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존재해야만 한다.

그 책임에 대해, 
그리고 리스크에 대해 인지하고만 있다면

그러한 세상 속에서는 
이야기하는 것에 자격은 필요 없으며,
앎 또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그러한 수 많은 앎 중에서 
진리인 것은 극소수 이기 때문이다. 

어쨋든 주제에 벗어나는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번에는 직감이라는 에세이의 첫 걸음으로써
직감에 대한 정의에 이어서 왜 직감이라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신 인류'와 구 인류에 대해


나는 사유와 직감에 대해 이야기 하기전에 
'신 인류'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만약 '신 인류'라면
사유와 직감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 인류 입장에서 
현 인류(신 인류 입장에서는 구 인류)의 사유와 직감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인류' 는 
구 인류의 모든 한계를 뛰어 넘었기 때문에
신 인류라는 존재 그 자체가 구 인류를 뛰어 넘어 버린다.

따라서 신 인류가 단순히 주장하는 것 자체가
수 세대의 거친 구 인류의 '부분적 진리'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신 인류가 아닌 
구 인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심지어 구 인류들의 수 세기 거친 
'부분적 진리'들 혹은 진리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이 후세에 거짓이였음이 밝혀지기 까지도 한다.

이런 수 많은 구 인류들의 역사를 본다면
결국에는 구 인류들의 대부분의 생각은 
진리가 아님에는 이미 증명 되었다.

물론 현대인 또한 이런 구 인류들에 속한다.

왜냐하면 과거의 동양, 사양 가릴 것 없이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선조들과 선조들의 역사들과
현대인들 스스로의 기록들을 보면 
비열하게 짝이 없는 구 인류임에는 틀림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 인류에 속하는 인간들의 대부분의 생각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구 인류는 말할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까?

그렇지 않은가?

대부분의 말이 진리가 아니라면
구 인류들이 밝힌 대부분의 것들은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결국 구 인류가 해야만 하는 최선은 
생각하고 말하고, 
또 생각하면서 '진리'에 다가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유를 통해 직감을 생성하고,
서로의 직감을 이야기하고 비판하면서
거짓에 가까운 것들을 소거하는 세공 과정을 거치면서
'부분적 진리'라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을 완성해야 한다.

그 보석이 수 많은 기술로 만들어진 
가짜 다이아몬드, 결국 거짓이라도 말이다.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세공 과정을 거친
'부분적 진리'가 거짓인지 아닌지는 
후세에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으며,

그런 부분적 진리들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의미는 분명히 있다.

후세의 구 인류들이 이 거짓을 소거할 수 있게 함으로써
후세들은 더욱 진리에 가까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 인류의 생각이 거짓이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사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 개인들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이 
스스로의 삶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신 인류가 아닌 이상 구 인류라면
전혀 진보 할 수 없는 삶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신 인류가 지금 현대에 존재한다고 한들
그들의 말이 진리에 가깝다고 한들
구 인류는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을까?

더 나아가 
구 인류들의 그러한 몸부림은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일까?

아직 탁자에 앉아서 
구 인류가 이야기 해야만할 철학적인 논의들이 너무 많다.

물론 이런 것을 모두 무시하고,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 한다.

나는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다.

그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의 것 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한 직감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이전 에세이를 통해 
나는 감히 직감에 대해 정의 내린적이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내린 정의를 보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이야기를 내심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그렇기에 나는 직감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기 앞서서
다른 사람들이 직감에 대해 어떻게 말하였는지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한 과학자를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 직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I believe in intuition and inspiration. 
나는 직감과 영감을 믿는다.
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욱 중요하다.
For knowledge is limited, whereas imagination embraces the entire world,
지식은 제한적이지만, 상상력은 전 세계를 수용하여 
stimulating progress, giving birth to evolution.
발전(progress)을 자극하고, 진화를 낳는다.
It is, strictly speaking, a real factor in scientific research.
단언컨데, (직감은)과학적 연구에 있어서 진정한 요소이다.

또한 직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짧고 강렬한 말도 하였는데

The only real valuable thing is intuition.
진정한 가치는 직감 뿐이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말을 통해 
과학자로서 직감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그 스스로가 직감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에 대해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 인물로 유명한 사업가를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스티브 잡스다.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용기를 가지고 당신의 마음(heart)과 직감을 따라라.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당신이 정말로 되고 싶은 것이 무엇 인지에 대해 마음과 직감은 이미 알고 있다.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모든 것은 부차적일 뿐이다.

또한 직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아인슈타인과 비슷하게 이야기 했다.

Intuition is a very powerful thing, more powerful than intellect.
직감은 매우 강력하며, 이는 지성보다 더 강력하다.

나는 이들과 만나본적은 없지만
위 두 사람은 나 이상으로 직감을 중요시 여기는 것 같다.

한국과 사유 그리고 직감에 대해


물론 내가 위에 두 인물을 소개 했다고 해서
그 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솔직히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내 앞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유년 시절은 좋지 않은 의미에서 
주목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주목 받지 않는 삶에 대해서 
지금도 굉장히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다.

다만 나의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그들의 권위를 조금 빌려온 것 일 뿐이다.

나는 권위를 그 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물론 중요할 수는 있으며, 권위는 분명히 가치가 있다.)
세상에는 권위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 꽤나 있기에
그 둘을 소개한 것 뿐이다.

또한 나에게 자격을 들이미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사실 그 둘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와는 크게 상관 없다.

다만, 나와 같이 직감을 중요시하는 
어떤 동료와 같은 느낌과
훌륭한 선조와 생각을 공유하고 있어 큰 영광이라 생각 한다.

어쨋든 이어서 내 이야기를 조금 해야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내 어린 시절에는 
직감을 가지기도 쉽지 않았으며,

가졌다고 한들 그런 직감을 
따르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기에 
사실상 허용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 하는 어린 시절이란
나의 유년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한국에서 지냈던 28년간의 시간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지금 시점에서 봐도,
미래 시점에서 봐도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 때 나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 스스로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를 보던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나의 선택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하는 
철없는 아린 아이의 생각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었겠지만,

그 당시 나의 선택들은
내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한 행동들 였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즉, 내 이성과 대화함으로써 
그러니깐 사유함으로써 행동했던 것들이 였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선택에 의심하지 않았고
어떠한 결과가 오더라도 나는 수긍했고
실패로서 진보할 수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해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했던 수 많은 실수들과 
실패보다 몇 개의 성공만 기억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에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고통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게해주어 
결국 성장할 수는 있었지만,
나는 가능하다면 
두 번 다시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어쨋든 한국 자체는 자유를 표방하고 있으며, 
자유를 소중히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대체로 소유에 대한 자유이며,

실제로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부동산부터 시작해 자동차 등의 값 비싼 소유물들 

그리고 생필품 이외에 것을 포함한 사치품들과 같은
어떤 물건에 대한 소유권에 대해 주장할 때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으로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보고 이야기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정말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자유'라는 단어에서 
소유에 대한 지분은 정말 일부분의 불과하고
대게 '자유'란, 사유에 대한 자유를 의미 했으며

보통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대게 사유에 대해 침해 받을 때 사용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사유란 사실상 허용되지 않았는데,
(일단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스스로를 어른이라 칭하는 사람들로 부터
자격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명문대를 나와야하고,
한국에서 높은 사회적 위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니가 뭘 아냐며' '니가 무슨 교수라도 되는 줄 아느냐'부터 시작해 
'니가 아직 사회를 모른다'를 거쳐,
(특히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면 
여기에 '아직 어려서' 라는 말을 붙이면 응용 패턴이 완성된다.)
마지막에는
'그렇게 불만이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국을 떠나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하거나
한 술 더 떠서 '한국을 떠나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사유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스스로 어른이라 칭한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의 유년 시절은 사실 
그런 어른들과의 반목이 대부분이 였다.

결국 한국을 떠나야만 '사유'할 수 있으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말이다.

사유를 하는데, 어떠한 자격이 필요하단 말인가?

과거의 철학자와 위대한 학자들은 
태어날때 부터 어떠한 자격이 있어서 사유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 자격은 누구에게 부여 받는가?

그것이 인간의 한계(비열함)을 뛰어넘은 
'신 인류'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라면,
그는 다른 The People들이 수긍할 만큼의
자격이 충분히 있을까?

하지만, 이는 사회의 The People들이 
해결할 문제지 단 몇 사람의 논의 가지고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에게서 부여 받을까?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신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해야하지만
이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유하는데에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가?

자격이 필요하다면, 누구에게 부여 받았는가?

또한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격을 부여할 만큼
충분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가?

역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자격이 있기에 
누구에게 자격을 부여 받았기에 
다른 사람에게 자격에 대해 묻고 요구한다는 것인가?

나는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해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내가 계승하고 있는 다른 선조들에게도
이러한 해답을 찾기는 힘들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면,
누군가 알려줬으면 한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사유하기를 권장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라고 표방하지만,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자유라는 자리에 자본을 집어넣어
'자본민주주의' 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 한다.

이처럼 자칭 어른들에 의해 한국 사회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고, 통제에 가깝기 때문에 

즉, 각 개인들이 사회를 떠나지 않고는 
사유 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철학적인 논의가 부족하며
함축되어 있는 언어에 대한 깊은 이야기

즉, 인간, 도덕, 윤리 등과 같이 
모호하지만 '올바름'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다.

뿐만 아니라 
'배려','혁신'과 같은 높은 가치를 지닌 단어들이 
본래 지녀할 가치보다 높게 보이기 위해 
남발되어 사용되다 보니, 

본래 지녀야 할 '배려'나 '혁신'과 같은 단어들의 
가치는 바닥을 찍고 있으며, 사라질 위기에 처해져 있다.

이를 증명하듯이 한국 사회에 '배려'라는
더 이상 올바른 것이 아닌 희생이 되어 버렸으며,
사회의 혁신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따라서 한국에서 스스로의 생각을 
사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에서 있던 시절에는 
나는 정치, 사회, 경제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직감을 커녕 
사유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었는데,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이는 의미있는 가벼운 논쟁보다는 
'자칭 어른'에 의해
'너는 어려서 아직 사회를 잘 몰라서 그렇다',
'니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느냐'면서 
내 입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난을 했기 때문이다.

어쨋든 나는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28년간 살아왔던 곳을 포함해
모든 인프라를 포기하고 이방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이 원한대로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스스로가 진실된 나의 직감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던 것은
한국을 떠나 이방인의 길을 선택하고 
이방인으로서 2년쯤 생활을 했을 때부터 였다.

그 이후 부터 
나는 한국에서의 제한된 자유라는 망령에서 벗어나  
정말로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었고,
나만의 직감을 가질 수 있었고, 
나의 세계는 이전보다 더 넓어졌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거짓된 세계에서 살아왔고,
내가 '자칭 어른'들에게 얼마나 휘둘리고 있었는지,
그리고 내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에 대해 갈수록 명확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안타깝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모국을 떠난 선택을 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 였다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사유와 직감에 대해


어쨋든 나의 과거 이야기는 이쯤 해야할 것 같다.

분명 한국에서의 
나의 유년기는 무척이나 괴롭고 험난했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던 가치가 있던 시간이였고

그 과정속에서 정말 조금이나마 
나를 이해해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였다.

내가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내 자신의 직감을 표현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나를 이해해주던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를 위해 도와준 것 처럼,
나 또한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어쨋든 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행했고,
앞으로의 미래도, 삶도 불행할 것 같았지만,
분명 어떤 사람들은 분명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 그러한 행위를 한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기 정말로 싫고, 
그런 취급을 받는 다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

만약 그들 처럼 나의 말이 거짓이라면,
나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전자에서의 이유이던, 후자에서의 이유이던

나에게 나쁜짓을 하건 그렇지 않던
사유는 각 개인들의 것이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자유이다.

이런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사유와 직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사유의 정의


이전 에세이에서 직감에 대해 정의를 내렸으니
생략하기로하고 사유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해보자.

보통 나는 옥스포드 사전을 기반으로 
정의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하지만 매우 아쉽게도 이번에는 
내가 생각하는 사유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정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은 참고하지 않고 바로 정의를 내리도록 하겠다.

내가 이야기하는 사유는 
이성(Reason)안에 있는 개념으로 볼 수 있지만 
조금은 벗어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유는 생각과 유사하지만,
직감에 도달하기 전 단계로 
아직 스스로 정당성을 찾지 못한 생각으로
이성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생각(Thought)이다.

물론 이러한 사유의 기저에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정당하다면 문제가 없다.

그렇기에 사유의 단계에서는 
다소 모순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고 매우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사유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이유는 칸트가 이야기한 
"형식적 규칙을 제외하고 주도면밀하게 제시하지 않고, 
엄격하게 입증하지 않았기에 논리학이 성공할 수 있었다"며 
이야기한 이유와 같다.

과학에서 이론을 제시할 때
주도면밀하게 제시하지 않고, 
엄격하게 입증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물론 어떠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에게 자격론에 대해 이야기 하겠지만,
그런 자격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보다

어떠한 행위에 대해 자격이 있어야 된다면 
그 자격은 누가 부여해야 되고,
그 자격을 부여하는 자는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끝 맞춰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런 자격론을 들이미는 사람들은 
선행되어야 마땅한 논의들에 대해 
논의는 커녕 이야기 조차 해본적이 없는 것이 대부분 이였다.

따라서 사유의 영역에는 자기 자신(이성)과 
자신이 구축한 형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다.

오직 나와 이성간의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사유의 영역은 매우 선험한 영역이다.

단, 자신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려 할 때,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사유의 영역에 들이려고 할때

즉, 사유에서 직감으로 옛것에 새것을 더한다는 의미에
진보를 하려 할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따라서 사유는 밀이 제시한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유 또한 존재할 수 없고,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날카로운 통찰 또한 없게되므로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직감 그리고 자유에 대해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보자.

그렇다면 왜 직감이 필요하고 중요할까?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한 사회의 개인으로서,
그리고 독립체로서 걸어가는데에 있어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직감을 얻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마치 독립체로서 맹인이 된 것과 다를바 없다.

따라서
스스로 직감을 가지고 이에 기반해 살아간다는 것은
한 개인이며, 한 독립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

즉, 자아가 생겨났을 때, 
인간은 드디어 사유할 수 있고, 
이런 사유를 발전시켜
어떠한 직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삶에는 책임이 동반 된다.

마치 자유에 책임이 동반 되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이 직감을 말할 때,
그 사람이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유라는 개념에 의해 사회적 합의에 의해 허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직감을 이야기할 때, 
자유라는 개념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자유라고 한다면, 또한 밀이 제시한
'자유'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밀의 자유에 대한 개념으로서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할 때, 
그러니깐 서로가 자신의 직감을 이야기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어떻게 대해야하는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중 "진리가 정말 진리일 경우"에 대한 논의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 하에서는 
대게 서로의 직감이 '진리'일 것이라고 필연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 나도 당연하다.

나의 경험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답고 인간스럽다.

내가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듯이,
상대 또한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기에

상대가 어떤 기저에서 
그런 "진리일 것이라는 것"를 추출해 냈는지 알 수 없으며,
상대 또한 내가 어떤 기저에서 
그런 "진리일 것이라는 것"를 추출해 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밀의 
"진리가 정말 진리일 경우"에 대한 논의가 해답이 될 수 있다.

밀은 "진리가 정말 진리일 경우", 
"진리에 대해 다시 한번 논의한다 한들, 진리는 훼손되지 않으며
더욱 견고해 진다"며 이야기 한다.

즉,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의 주장이,
자신의 직감이 정말로 "진리"라면,
훼손될 수 없으며, 
오히려 한번 더 증명함으로써 더욱 견고해 진다는 것이다.

예컨데, 수 많은 과학적 논쟁을 통해 
현재에 들어서는 지구에 사는 인간 뿐만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그리고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우주까지 
중력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이런 것들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현대인들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진리에 가까운 "부분적 진리"임에는 틀림 없다.

여기서 이런 
중력에 대해 아무리 논쟁을 한다고 하더라도 
중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훼손시킬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중력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고 
증명됨으로써
중력이라는 진리가 오히려 더욱 견고해 지는 것이다.

이 처럼 각 개인은 스스로 "직감"을 가질 수 있으며,
이런 직감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떤 직감이 진리인지 
아니면 부분적 진리인지는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진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떤 직감은 좀 더 다듬는다면
훌륭한 부분적 진리가 될 수 있는 원석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직감을 가진다고 한들 
비판이라는 문을 
활짝 열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비판을 거치면서
직감은 다듬어지고 더욱 견고해지는 과정을 거쳐
인류는 또하나의 부분적 진리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가 비난이고 비판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이에 대한 논의가 나는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 한다.)

위에서 잠깐 이야기 했듯이

밀의 이야기 처럼 정말 그 직감이 "진리"라고 해도
비판받지 말아야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는 직감은 
밀의 "부분적 진리"의 하위 개념으로
사유를 통해 탄생한 것으로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사회의 통념을 꽤 뚫는 날카로운 '원석'을 말한다.

이 '원석'은 
고찰과 성찰 이라는 이름의 세밀한 세공과
비판이라는 이름의 반복해서 불순물 제거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부분적 진리"가 되고, 
직감은 더욱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밀의 자유론이 전 세계에서 훌륭한 고전으로서 이야기되어지고 
평가 받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소개한 "진리가 정말 진리일 경우"외의 
다른 논의들도 정말 훌륭하다.

이런 밀의 자유론으로서 
자유가 허용된 지금의 현대 사회가
자유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까지 있으면,
나이만 들어가는 책임감 없이 말을 내뱉는 
'자칭 어른'이 아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현대 사회에서의 
'진정한 어른'으로서 거듭날 수 있을 것 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두가 "부분적 진리"에 도달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여기까지 해서 직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고,
이에 더해 밀이 제시한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렇다면 모두가 "부분적 진리"에 도달할 필요는 있을까?

즉, 나는 앞서 사유할 필요가 있고, 
직감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인 진리에 가까운 
"부분적 진리"에 도달할 필요가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 한다.

물론 인간으로서 각 개인이 "부분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인류로써
이런 부분적 진리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하지만, 모든지 노력만 하면 된다는
이를 신봉하고 있는 
낙관론자들에게는 매우 안타깝겠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말대로 4시간 잠만자면서 
부분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어쩌면 가능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진리를 찾는 여행은 매우 험난하고 고난하며,
대게 몇 세대에 걸쳐야만 도달할 수 있었다.

단순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다수의 개인들의 비판과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개인들은 현재 뿐만아니라
후세의 개인들에게도 비판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판단은 오직 
후세의 개인들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몇 세대에 거쳐 증명된 
'진리'들이 후에 논파되면서 거짓임에 증명되기도 한다.

과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갈릴레오와 갈릴레오의 제자가 
피사의 사탑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있는 
질량과 무게에 대한 실험
(정말 갈릴레오가 했는지, 피사의 사탑에서 이루어졌는지는 다소 논란이 있다)
에서 과학자들이 믿고 있는 '진리'는 논파되기도 했다.

이러한 '진리였던 것' 외에도 
진리에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적 진리 또한 마찬 가지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에 대한 논쟁"에서 부터 
양자 역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했고,

여러 양자역학 해석 중 코펜하겐 해석,
그러니깐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이 해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자역학이 현대인에 있어서
"부분적 진리"중의 하나 일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것이 정말로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현재의 현대인들은 알 수 없을 것이며,
늘 그렇듯이 이는 후세의 몫이 될 것이다.

결국 이 처럼 
부분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 많은 사람들과 만나야하며, 
이야기를 함으로써 불순물을 제거할 필요가 있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와의 불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지니스를 해야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는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으며,
결정적으로 
이 세상 모든 개인이 그러한 과정을 즐기지는 않는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일부 존재하듯이
그러한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도 일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우월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인간으로서 보면 그런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나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나 큰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이라는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아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비열함에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족쇄에 벗어날 필요가 있다.

논리학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해 
(형식적 규칙을 제외하고 주도면밀하게 제시하지 않고, 
엄격하게 입증하지 않는 것)
논리학이 성공을 이루었다는 칸트의 말 처럼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 날 수 없는 현대인도
인간의 비열함이라는 한계를 인정하고 
비열함을 억누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것들은 결국 위선에 지나지 않으며
위선은 인간을 왜곡하고 결국 사회를 왜곡한다.

흔히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현자라는 부류는 
이에 근접한 사람들은 몇 있었으나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유를 통해 생성된 직감만을 
혹은 고찰과 성찰이라는 세공 과정을 거친 
"직감"만 가져도 충분하다고 생각 한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할 필요가 있는데,
충분한 세공 과정과 충분한 불순물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못할 수록
그 직감은 진리와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직감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않을 수록
이에 대한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의 비열함에 사로 잡히게 된다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의미가 사라지게 되며,
각 직감에 대한 불순물 작업을 진행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게 된다면 
대화에 의미는 점점 퇴색되며,
결국 밀이 이야기 한대로 
진리에 다가갈 기회를 놓치게 된다.

직감을 가지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할 것


직감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개인으로서는 매우 소중하다.

직감은 스스로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고
개인을 지탱해주는 큰 힘이 된다.

왜냐하면 직감은 마치 신앙에서 믿음의 영역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한 길은 완벽하지는 않고,
때로는 막다른 길에 다다를 수 있지만
우회하거나 다른 길을 선택하는 등의 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나이가 어리건, 나이가 많건
돈이 적건, 돈이 많건,
지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건, 지적 능력이 뛰어나건
이는 중요하지 않다.

통념을 꽤뚫는 직감은 
이를 말로서 표현을 잘 하지 못할 뿐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이를 사유함으로써 직감으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내가 한 사회에 개인이듯이 
타인도 이 사회에 개인이고,

나의 직감이 소중하다면,
타인의 직감 또한 소중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발을 잘못 디딛는다면 매우 위험한데,

바로 자신의 직감을 너무 소중히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직감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심지어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수 없이 봐왔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언행은
다른 개인들을 '대중'으로 놓고,  
스스로가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며 
이런 대중들은 멍청하다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데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난 '자애로운 현자'만이 가능하며,
이런 인류의 한계를 극복한 '신 인류'만이 가능하다.

자신이 그런 '신 인류'에 속한다면
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은 인간의 비열함이라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왜 일까?

그들이 정말 우월한 '신 인류'이고 
나는 열등한 '구 인류'이기 때문일까?

물론 그들이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멍청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한 없이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진 그의 이야기를
이해 못할 수도 있는 가능성은 충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그들이 '신 인류'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

자신의 지적 능력을, 자신의 유용성을 
사회에 증명하지 못하고 
사회에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런 한 없이 높은 지적 능력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또한 그들이 정말로 신 인류라면
그들의 이야기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해야 할 행동은
그러한 '진리'에 대한 비판을 계속적으로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말 진리라면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 없이 높은 지적 능력을 이용해 시간에 걸쳐 증명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위는 아니다.

그럴때 마다 나는 그들이 정말로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는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이미지로 가지고 있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골방 노인네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위에서는 노인네라고 이야기 했지만, 
물론 이는 나이와는 상관 없는 현상이다.

누가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겠는가?

이는 나이와 상관 없이 말이다.

자신의 직감이 소중한 것 과 같이 
타인의 직감 또한 소중한 것이다.

그런 타인의 직감이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던 말이다.

직감은 자아의 깊숙한 곳에서 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런 직감을 짖밟는 행위는 자아를 짖밟는것과 같다.

또한 '신 인류'가 아닌 현재의 '구 인류'이라면 
직감 자체는 하나의 원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불순물을 제거해 
좀 더 진리에 가까운 '부분적 진리'에 다가가야 한다.

이것이 나는 진정한 대화고,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커뮤니케이션은 경쟁이 아니며 
싸움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 이다.

서로의 직감을 증명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을때

그러니깐 서로 옛것에 새것을 더하는 
진정한 진보를 이루려고 하려고 할 때,

경쟁하듯이 상대를 이기려 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경쟁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며,

각 개인이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최고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이미 존 내쉬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그런 과정에서 이겨봐야 얻는 것이라고는
마치 패싸움을 하듯이 자신이 이겼다는 만족감 만을 얻을 수 있다.

사실상 서로 주먹을 겨누고 패싸움을 하지 않았을 뿐
결과적으로는 패싸움과 다름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승자가 패자에게 손을 건내며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을 기대해볼 수는 있겠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로를 미워하게 되며, 혐오라는 감정이 생겨날 뿐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고자하는 이유는 
서로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가?

물론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하면서 즐겁기 위해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대화는 그러한 대화와는 거리가 멀며,

대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진보하기 위해서 이다.

밀이 말을 조금 빌리자면,
서로  진리에 다가갈 기회를 놓친 것이다.

겨우 상대를 굴복시켜서 만족감을 따위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목적에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직감과 직감이 대립할 경우


그렇다면 직감과 직감이 대립할 경우
어떤 스탠드를 취해야 할까?

매우 아쉽게도 나는 
밀의 자유에 대한 정의에서 이를 추출해낼 수는 없었으며,
다른 선조들로 부터 계승한 직감들로부터 또한 추출할 수 없었다.

결국 늘 그렇듯이 
이에 대한 몫은 그들의 후손인 나의 역할일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가장 좋은 것은 서로 의미있는 비판해가면서 
서로의 직감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데
왜냐하면 비난과 비판이라는 경계가 매우 애매하기 때문이다.

비난과 비판은 종이 한장 차이이며,
어떻게 받아드리느냐에 따라 
정당한 비판이 비난으로 들릴 수 있기에
이런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현실에서 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한쪽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순간
팽팽했던 줄이 끊어지면서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다.

무너지는 순간 의미있는 진보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합리적인 척하는 인간의 비열함과 저열함이 
너무나도 잘 나타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에 대해 내가 내린 차선의 선택은 
대화를 멈추고 서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서로가 옳은 길로 향해 가고 있다면
목적지가 정말로 옳은 길이라면,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한들 
결국 어느 시점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어떻게 도착하느냐,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여기서 먼저 도착하건 늦게 
도착하던 큰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목적지에 가는 이유는 
증명하기 위해서 이며, 증명한 순간 
그 외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게임의 룰은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증명 했느냐, 증명하지 못했느냐
0과 1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속에서는 서로의 길에 대해 비난 하고,
틀릴 것이라며 손가락 질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마치 내 유년 시절 '자칭 어른'들이 나에게 
침을 튀어가며 이야기 했던 전설 속의 이야기와
그런 기저로 나에게 자주 했던 행위 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몇 번이나 이야기 했듯이
대화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벗어나며,
되도록 적은 만들지 않는 편이 좋으며
적을 만드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스탠드는 
결국에는 각 개인의 판단에 맞길 수 밖에 없다.

자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선택이다.

물론 대게는 자신을 믿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다.

스스로의 직감에 너무 심취하면 
아무리 옮은 길로 가고 있다고 할 지라도
인식도 하지 못한체 길에 벗어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안의 비열함이라는 괴물들이 

속삭히는 달콤한 말에 대게 
귀를 귀울일 필요는 전혀 없으며,
그런 것들은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안내 한다.

결론


이렇게 해서 직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다.

나의 직감에 대한 직감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라.

자신은 스스로 직감을 가지고 있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가에 대해 말이다.

아마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스스로 직감을 가지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거듭하고, 고찰하고 성찰해나간다면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나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기도 하고, 사회의 개인이며,
이는 타인들도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한 것들로 삶이 윤택해졌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삶이 윤택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결코 해낼 수 없었지만
어쩌면 다른 개인들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직감들을 사회에 시험해보는 과정속에서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큰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럴때마다 고찰하고 성찰하여
허용된 경계를 찾아내면 된다.

그리고 이런 허용된 경계를 발견해냈다면,
그 개인은 나라는 한 객체라는 
'개성'이라는 것을 얻게될 것이고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참된 옛 것에 새것을 더한다는 의미의 진정한 '진보'이다.

하지만 그에 준하게 
자신을 조심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너무 심취한 순간 
저열하고 비열한 인간 본성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이는 윤택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한국의 '자칭 어른'들이라는 부류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어김없이 드러내고 
그리고 뽐내는 그런 사람들은
세계 어디서든 존재 한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보다 경험이 부족하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대체로 타인을 위함이라며 정당성을 확보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한다.

말로는 남을 위해서, 너를 위해서 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물론 정말 눈꼽 만큼의 의도는 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타인을 위해서라는 
정당성은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따라서 그 들은 
때로는 한낱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런 말을 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이나  
이에 준하는 직감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단 한번의 비판에 의해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 수 있음을 
그들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러한 사람들을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고,
그러한 자격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기에
자신의 직감을 마음 껏 이야기하고 
대화하는데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물론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오기 때문에
그러한 말에 대한 리스크를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말이다.



2021.08.01 초안 작성 및 개행 완료
2021.08.07 신 인류 문단 추가 및 다듬기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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