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읽어야 만하는가?
최근 들어서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런 주제로 생각해본적이 없기 때문이고
실제로 나도 그러한 이야기를 해본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논제에 대해
당연히 읽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을 것 이다.
나도 읽어야 한다는 논지에 대해서는 딱히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왜 읽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철학적인 논의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졌다.
왜 읽어야만 하는가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책을
왜 읽어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책을 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물어보면
마치 어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라고 세뇌를 했거나
다같이 그렇게 하기로 한듯이
마치 영혼이 들어가 있지 않은 대답들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으로 예를 들면,
한국 수능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혹은
대학 입학 시험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보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는
어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수 없이 들어 왔다.
나는 이런 현실에 대해 조금 의문이 들었고
지금에 와서는 의심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어떤 행동에 대한 이유는 대부분 다를 것인데,
대부분 책은 읽어야한다고 사실에 대해서 동의하는 상황에서
어째서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대부분 영혼 없는 대답이 들려오는 것 일까?
물론 이런 이유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살짝 언급했듯이
아무도 철학적인 논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 없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으며,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없으니 책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책 뿐만이 아니다.
그것이 책이던 외국어던 수 많은 어른들은
해야만 한다는 것을 수도 없이 침이 튈 정도록 떠들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철학적 논의는 전혀 하지 않으며,
심지어 논의를 온몸을 비틀며 거부함은 물론이고
나이부터 시작해 온갖 권위를 내세우며 찍어누르려고 한다.
이번 논제는 이런 것들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어쨋든 나는 책을 가까이 해야한다거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진실되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책을 가까이 해야한다는 단순한 말 보다
왜 가까이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철학적인 논쟁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조금 꺼려 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조금 무거운 주제이다.
또한 내 눈에는 그렇게 결론지어서
남에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행위로 밖에 안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나의 말에 걱정되서 하는 말이라며
온갖 변명을 둘러대겠지만 말이다.
단순한 그러한 말은
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린 꼬마 아이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말로 걱정된다면 그러한 무책임한 말보다는
가벼운 철학적 논쟁을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스스로 동기 부여가 되지 않으면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 것에
스스로 강력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얼마나 좋은 책을 읽어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 어느 타이밍에 읽어야 하는가도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실수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속에서 인간의 생각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유니크함을 기저로해 끈임없이 개선 된다.
그렇기에 유년시절 읽었던 해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노년시절 읽은 해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다르게 읽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책을 읽는 타이밍이 내적 성장 단계가 아니라면
얼마나 훌륭한 책을 읽는다고 한들
단순히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가 내적 안정기에 접어들었을때 보다는
내적 엔트로피가 어느정도 쌓였을때
좋은 직감들을 주는 책을 본다면,
다른 사람들의 좋은 직감들으로 부터
자신만의 직감을 추출하고, 직감이라는 원석을
성찰과 고찰이라는 도구로 다듬어 하나의 보석으로 만든다면
자신의 유니크함에 새로운 보석을 박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석이 쌓이면 쌓일 수록
나라는 개인은 스스로 빛을 내게되고 '개성'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책은 이런 보석들을 만들 수 있는
수 많은 원석들 중 하나이며,
과거 그리고 현대에도 통용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책을 읽어야하는가?
그렇다면 책은 얼마나 읽어야 할까?
100권? 1000권?
그 다음으로 장르는 어떤 것이 좋을까? 고전? 철학? 문학? 판타지 소설?
수 많은 어른들이 입을 부르틀 정도로 강조 하듯이
(그들이 그 책을 읽고 말하는 지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판타지 소설은 하찮기 때문에
누구든 들어 봤을 법한 유명한 고전을 읽어야 할까?
나는 이런 얼마나 읽어야 할까에 대해
그리고 고전을 읽어야하는지에 대한 논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 한다.
왜냐하면 얼마나 많은 책을, 그리고 고전을 읽는다고 한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속에서 자신의 직감을 얻어내지 못하면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보석을 얻으려고 곡괭이를 들었으나
원석을 캐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더 나아가 이 직감을 살려 현실속에 녹아내지 못한다면
더더욱 의미는 희미해 진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 한들, 수 십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들
작가의 직감을 캐치해, 자신의 직감으로 변환하고
이를 현실에서 녹아내지 못한다면
'책을 읽었다'라는 거짓된 훈장이 자기 가슴속에 수 없이 달릴 뿐이다.
더 이상 단순히 지식이 높은 유용성을 가지는 시대는
이미 꽤 오래전에 지났다.
동양권에서 이야기하는
공자왈, 맹자왈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공자와 맹자의 말을 분해하고 파헤쳐
이를 현대 사회에,
그리고 자신의 삶에 녹여내지 못한다면
정말로 큰 의미가 없다.
IT업계로 예를 들자면,
인터넷 구석진 어딘가에 처 박혀있는
아무도 모르는 라이브러리를 사용할 줄 안다고
콧대를 높이며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런 라이브러리가 얼마나 유용성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정말로 유용성이 있다면,
다른 누군가가 계속해서 사용할 것이며,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공유되며
널리 사용되었을 것이다.
정보의 대칭성은
이미 인터넷이라는 기술이
기울어져 있던 대칭을 점점 평평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가 그런 거짓된 훈장의 갯수에 가치를 두고
스스로 만족한다면 어찌되었던 간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말, 정말로
꼴 사나워보인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직감을 얻어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책을 읽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말 사소한 직감이라도 얻었다면,
책을 읽었다는 의미는 분명 있다.
이러한 사소한 직감들은 후에
연결 고리로서 큰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꼴사나워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마치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처럼
허영심에 가득 차 보이는 사람들이
때때로 우리 삶속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장르의,
몇 권의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논제는 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책으로 부터 작가의 직감을 붙잡아, 자신의 직감으로 만들고
얼마나 이를 현실속에 녹일 수 있느냐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직감을 서로 이야기하며,
옛것에 새것을 더한 다는 의미의 진보를 할 수 있느냐의 차이다.
단 한권의 책을 읽고 이런 프로세스를 완성한 사람과
수 만권의 책을 읽고 이런 프로세스를 완성한 사람은 별 다른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꼴 사나워보이는 수 십, 수 백개의
거짓된 훈장을 가슴에 차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면, 거짓된 훈장을 차고 다니며
지적 허영심을 과시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만족시키기에는
그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에도 존재해 왔으며,
지금에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에 한계에
직면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한계를 들먹이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한계가 있더라도 이를 인지하고, 인정한 다음
보완할 수 있는 방향을 설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동물보다 인간이 아주 가장 잘하는 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인간의 한계를 들먹이며,
정당화하는 것은 옳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나는 이는 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런 행위에 대한 책임은
각 개인이 지어야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사람들의 앞길에 무구한 영광이 있기를 바라며
그저 엄지를 치켜들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봐라
얼마나 많은 훈장을 받았다고 한들
결국 집안 구석의 장식품이 될 뿐이며,
그 훈장의 무게 만큼,
그 갯수 만큼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훈장이라도
그 무게의 가치를 스스로 아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남의 시선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케네디 대통령과 청소부의 꽤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케네디가 나사에 방문 했을 때,
빗자루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우주선을 띄우는 일을 하고 있다며
자긍심을 가지며 말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훈장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훈장 없이도
이미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데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훈장이 유용성이 지닐 수 있을 때는
오직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을 때 뿐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조금 가벼운 철학적 논쟁이나
스스로 성찰과 고찰이 필요하다.
단순한 그러한 이야기를
내 뱉는 행위는 굉장히 무책임한 말이며,
내가 보기에는 남보다 우월하다는 비열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읽어야 한다라는 이유를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스스로 그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즉 이에 대한 직감을 얻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결국 이런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고 성찰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
그 누구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며
읽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은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며,
인간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저주와도 같다.
그렇기에 인간은 선조들의 기록을,
구전을 소중하게 보물처럼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승자에 의해 거짓말 처럼
꾸며져 있어 보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중 2000년이라는 먼 과거에도
그리고 현대에도 통용되는 책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보물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류의 보물인 책으로 부터
선조들의 생각을, 실수를 엿보고 배워야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직감들을
다른 사람들과 가벼운 철학적 논쟁을 함으로써
직감은 좀 더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보석 세공사가 마치 원석을 깎는 행위를 하고,
깎으면 깎을 수록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런 이유에 대해
나의 직감을 이야기한 것일 뿐이고
이는 나만의 유니크함인 것 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좀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성은 있어 보이며,
자신에게도 그리고 상대에게도 이는 분명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