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tecture, Technology ,Web ] SSO(Single Sign On) 그리고 SAML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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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 내부에서 어쩌다보니  유저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야하는 업무는 내부에 사용했던 적이 없던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서  SSO의 프로토콜 중  SAML을 이용해 앱의 인증을 구현해야만 했다. SSO를 생각해본적 조차 없는 상황에 이를 새로운 개발 플랫폼에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구현에 성공하였으며 덕분에 SSO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지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SSO에 대한 정의 먼저 사전적 정의 부터 살펴보자. 다만, 기술적인 용어다보니 자주 사용하는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교차 검증을 해보자.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Single sign-on (SSO) is an identification method that enables users to log in to multiple applications and websites with one set of credentials.  SSO는 웹사이트에서 한 번의 인증(one set of credentials)으로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 할 수 있는 인증(identification) 방법(method) 이다.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의 정의이다. Single sign-on (SSO) is an authentication scheme that allows a user to log in with a single ID to any of several related, yet independent, software systems. SSO는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있는 몇몇 소프트웨어에 대해 하나의 ID로 로그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인증 구조(scheme) 세부 설명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추출해 이를 연결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산출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연관되어 있

[ Essay - Intuition ] 나의 선조, 조상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


서론


사회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강력하게 결합되고
그 동시에 과학이 빠르게 발달하는 시대에 들어서서 
선조, 조상이라는 말은 
이미 구시대적이며 매우 낯선 단어가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어쩌면 몇 천년 전 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을지도 모르는 
선조들과 조상들의 지혜는 과학에 의해 
철저하게 검증되고 폐기되었고 

여기에 더해서 민주주의 사회 시스템에 의해 
개인이 더 강조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폐기 과정을 거치면서 
정말 소수의 지혜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가치를 보존하기에는 
설득력이 매우 떨어져 보였고

떨어진 설득력 만큼 
가치가 사라짐으로써
선조와 조상 이라는 말 또한 
일상 생활에서 찾아보기란 더더욱 힘들어졌다.

결국 선조들과 그들에 의해 전해내려오는 
규칙들과 조언들이 담겨 있는 무형의 가치들은 
과학이라는 거대하고 뜨거운 태양에 의해 
물이 증발하면서 사라지는 것 처럼 
어디론가 승화 되어 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보면 
과거의 조상들이 그들의 선조를 기리고 소중히 한 것 처럼 
자본주의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선조와 조상은 과학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이런 선조와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한국의 선조와 조상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특히 한국은 더더욱 낯선 단어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한국의 근/현대의 역사는 
한국으로서는 지우고 싶은 치욕적인 역사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침략을 당한 조선 왕조를 
가능한 무능하게 평가해야만하고
침략을 한 일제를 
가능한 잔악무도 하게 평가해야만 하는 것 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조선을 배제해야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되었던 
이 경우 조선이라는 나라를 
철저히 배제해야만 하기 때문에
  
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 그들의 선조로 부터 계승했거나 계승하려고 했던 
사고관, 윤리, 문화 등의 
무형의 가치 또한 철저하게 배제해야만 했으며 

그 결과 조선 이전 부터 생존해왔거나 
조선이라는 나라 안에서 꽤나 긴 시간동안 생존해왔던 
무형의 가치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즉, 한국의 레거시는 전달되려는 시도조차 
철저하게 차단 되어 가늘고 길게 연결되어있었던 
실이 끊어져버림 셈이다.

최근에야 이러한 가치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는 있지만
그마저도 문화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지극히 경제적인 것들에만 제한되므로
반쪽의 반쪽짜리 밖에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간혹 이런 무형의 가치들이 
언급되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마저도 어떠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모면책으로써 사용될 뿐 
레거시를 계승해보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으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역할이라고 함은
같은 민족인 선조의 행동을 파악하고 
어떤 결과를 낳게되었는지 과정을 분석하여 
똑같은 상황에 처해졌을 때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대처 했을 때 
그 역할을 다한다고 볼 수 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서 밖에 활용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반쪽짜리도 되지 않는 역할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치욕적이라면 더더욱 이를 분석하고 
여기서 미래를 대비하고 기록을 남겨 
한국의 미래에 자손들에게 까지 역사적인 사실로서 
이를 전해야만 하지만

같은 땅에 존재했었던 과거의 영웅들에 대한 
휘황찬란한 업적을 기리는데 그칠 뿐 이다.

살아왔던 환경과 시대의 패러다임은 다르지만
결국 큰 틀로 보면 같은 땅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러한 제한적인 상황에서 나타나고
동일한 상황과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고찰과 성찰의 매개체로서는 사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부끄럽게도 이러한 것에 대한 언급에만 그칠뿐 
실질적인 행동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 있는 논의와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해서는 
미래의 한국의 자손들에게 맡겨야만 할 것 같다.

개인에게 있어서 선조와 조상

인류의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대게 승자의 기록이였고 
대게 자국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활용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구 인류로써 그러한 행동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보는게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 가보자.

나의 선조와 조상은 누구인가?
즉, 개인들에게 있어서 선조와 조상은 누구 일까?

같은 성을 가진 과거에 살았다던 
흔히 말하는 조상일까?

하지만 나는 서론에서 이야기한 이유로 인해
그들에게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는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전체로 봤을 때는 한국의 레거시를 
일반적으로 받게 되는 성으로 보자면 
가문에 대한 레거시를 계승받지는 못 했다.

물론 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계승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나에게 성을 물려주게 된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나의 조상은 아닌 것이다.

물론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한국의 격언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불쾌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피보다 정신의 계승을 
더 중요시 여기는 나에게 있어서는 
피라는 혈연은 나에게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지도 않기 때문에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한 피가 옅으면 옅을 수록 
그러한 가치가 기하급수 적으로 떨어진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잘 모르는 동네 아저씨 보다 나은 수준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나의 선조나 
조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였다.

왜냐하면,
나는 또 다른 수 많은 사람들로 부터 
정신을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계승 방식은
나의 세계를 넓혀주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나의 선조와 조상은 
나에게 직관과 관념을 가질 수 있게 해준 
과거의 모든 사람들이다.

미국의 건국 설립자들이 현대에 미국인들에게 
자유라는 레거시를 남겨놨듯이 말이다.

그들이 남긴 레거시와 정신은 
한국에 수 많은 어른들에게는 들을 수 없었던 
수 많은 의문에 대한 대답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나에게 들려주었다.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그들이 어떤 성별이건, 
어떤 인종이건,
종교를 가지고 있던, 
도덕적으로 훌륭하건 훌륭하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르침이 나에게 
새로운 길로 안내해주었고,
실제로 나의 세계는 넓어졌기 때문이고

넓어진 세계를 현실의 세계와 대입해보고 
비교해본 결과 완벽하게 일치 하지는 않지만,
방향성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 수 많은 비열한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나
그들과의 대화보다 고작 책 몇 권이 
비교하기가 창피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으니

내가 그러한 비열한 어른들을 
존중과 존경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이다. 
 
이는 기존의 혈연으로 이어지는 
선조와 조상과 큰 차이는 없다.

기존 혈연의 조상들이 
남긴 구전, 전통을 계승하는 것 처럼 

나 또한 그들이 책이라는 매개체에 남긴 
구전과 정신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혈연으로 이루어진 조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큰 차이는 없다.

물론 나는 기존의 혈연으로 계승하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혈연을 정말로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방법의 차이일 뿐 우열을 가르려고하는 것은 
어리석고 멍청한 짓일 것 이다.

그러한 논의를 통해 우월함이라는 
비열한 욕망을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길은 서로의 대한 포텐셜을 점점 소멸 시키는 것 뿐만아니라
서로의 유효한 시간 또한 소모시키는 일 밖에 안된다.

이는 분명한 소모적인 논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밀의 말 처럼 진리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며,
아무런 가치도 창출 할 수 없다.

물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월함이라는 
비열한 욕구를 만족시키고 싶다면 
그러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선조와 조상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쯤에서 이러한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 이다.

선조와 조상이 꼭 필요할까에 대한 의문이다.

서론에서 이야기 했듯이
현대인들에게 지혜와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은 과학이기에
지금과 같이 과학을 신봉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으로써는 
과학에 대한 레거시를 받을 수 있을 뿐

인간 자체에 대한 레거시를 받아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추측을 해볼 수 있을지 언정 
인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현대에는 이를 규명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에게 선조와 조상이 필요한 이유는 
과거 2천년 혹은 그 이상에 시대에 살았던 인류와
현대인들 모두 구 인류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들 중 대다수는 
이미 선조와 조상들이 이미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었고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를 시도 했고
시행 착오를 겪었으며,  
일부는 솔루션이 이미 나와있기도 하다.

물론 이 것들 중 일부는 실패로 남아져있는 것들도 있으나 
그 조차도 단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는 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더 멀리갈 필요도 없다.

단순히 소거법으로 생각해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선조와 조상이 필요한 이유이다.

좀 더 나아가서 개인으로서 
선조와 조상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보자.

과거의 철학자들이 
이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해왔고
그 시대 사람들과 어느 정도 논의를 거쳐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즉, 현대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다수의 고민들은
과거에도 존재해왔으며,
이미 선조들이 오래 전 부터 생각을 해왔다고
일부 이에 대한 솔루션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 이다.

물론 어떠한 사람들은 
이는 제대로된 솔루션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나

아예 단서가 없는 상태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 보다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는 상태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방향성을 정하는데에 매우 유리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보기 힘들다. 

현대인들이 신봉하는 과학 또한 
선조들에게 일부 빚을 지고 있다. 

과학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현재 생각해보자면 이런 방식은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조와 조상의 경우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텍스트를 기반으로 
성찰과 고찰을 거듭하여 
이를 현실에 대입해볼 수 밖에 없다

과거 아테네의 역사를 보아라.

아테네가 어떻게 멸망하였는지 알아본다면
현대인들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멸망하게 될 지에 대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 이다.

물론 지금까지 나누었던 이야기는
우리가 구 인류라는 가정하에서만 성립한다.

즉,  지금 현대인이 신 인류라면 
구 인류의 한계를 뛰어넘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구 인류들의 역사 따위는 불쏘시개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현대인의 수 많은 과오를 보면 구 인류에 가깝다고 본다)

물론 스스로 신 인류라고 생각하는 부류가 존재하기는 하다.

역사를 보며 혹은 과거의 기록물들을 보며
과거 선조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는 부류인데

그들의 행동 양식과 흔히 교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과거 선조들의 시행착오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이며

이러한 결과물들을 사용하고 있다면
현대인들은 선조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과 가깝기 때문에
누가 미개한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법 한 문제이다. 

물론 스스로 신 인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정말로 신 인류이기에 구 인류의 한계를 극복했을 수도 있다.

신 인류의 생각을 구 인류로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구 인류로서 매우 유감을 표할 수 밖에 없다. 

나의 선조와 조상의 뿌리에 대해

이 처럼 기본적으로 
나의 뿌리는 혈연에도 국가에도 기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의 부모님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내 유년 시절인 
한국에서 28년간의 생활 안속에서
크고 작은 문제 투성이 였고,
 
내가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양친의 힘이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것 이다.

다만, 부모님이 지니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뿌리와 다를 뿐이고,
이를 기저로 한 부모님이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그 곳에는 우월함과 하등함은 없다.

다르다는 사실 단 하나가 있을 뿐이다.

정말 그것이 옳은지 무엇인지는 
지금 상황에는 알 수가 없다.

만약 알 수 있다면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니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 보다 
주식을 사거나 서울역 한복판에서 돗자리를 까는게 
본인에게 더 나을 것 이다.

어쨋든 지금의 나의 정체성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여러 조상들로 받은 직감과 통찰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지금 현재 가장 깊은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뿌리에 있는 것을 뽑으라면 자유이다.

정확히는 밀의 자유이다.

실제로 나는 그런 밀의 자유를 기저로해  
행동하고 있고, 판단하고 있으며

내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던 의문을 해결하고 
스스로 족쇄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나의 부족한 레거시를 채우기 위해 
이러한 조상들을 찾고 있다.

결론

서론에서 이야기 했듯이
물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피는 물보다 진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 피라는 것이 
분명 가치가 있을 것 이다.

그것이 내가 필요로 했던 
정신적 레거시던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이 가지려고 했던
부라는 물질적 레거시던 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나는 인정하는 바이며,

사는 방식이, 수용하는 것이 다를 뿐이고 
여기에 어떠한 우월하고 하등한 것은 없다.

동일하게 
매우 애석하게도 우리가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애써 반박하며 나무라기보다는

자신 주변에 훌륭한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부모님과 지인을 포함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 될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유년 시절 겪었던 수 많은 
자칭 어른들이 행동했던 것 처럼 행동 한다면
그런 사람들과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쾌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이제는 나는 가능하다면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내 주변을 긍정적인 목소리로 채우고 싶다.

밀과 키케로 그리고 칸트 
그 외에 사람들로부터 계승해온 정신은
스스로 어른이라 칭하는 자들의 족쇄로 부터
벗어나게 해주었고,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였으며,
나의 성씨를 이룬 피로서 맺어진 선조가 아닌
그들을 선조로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살아가면서 
내 안에 존재하는 무형의 가치들을 시험해보고 있으며
대부분은 틀리지 않았으며, 
틀렸다 하더라도 개선의 여지는 존재하기에
그들의 가치를 따르는 것에 거부감은 없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 한다.

내 내면에는 이러한 선조들이 
살아움직이고 있고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고

나는 그들의 눈을 의식해
자만과 기만이라는 괴물로 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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