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한국 내에서 누군가에게 꿈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대게 '성공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것 이다.
물론 이에 대한 속내는
대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에 가깝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으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그에 따른 이득은 어떠한지
즉, 리스크는 어떠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먼저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사람마다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깊은 대화를 나누어볼 필요가 있는데
예컨데 위에서 이야기한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말 또한
자신의 현재 사회적 위치에 따라 매우 달라질 수 있을 것 이다.
어린아이라면 몇 만원짜리 장난감을 사기 위해
부모의 허드렛일을 하는데에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사회 초년생이라면
그동안 억눌려있던 소유의 욕망을 풀어내기 위해
중년 즈음 되면
주식, 부동산과 같은 자산을 얻어내기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가 싫어하는 것을 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자신의 현재의 위치에 따라 성공이란 매우 상이할 수 있다.
중년에게 있어서 하루 몇 시간이라면 벌어낼 수 있는 푼 돈이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성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인간에게
두발로 걷기란 숨을 쉬는 것과도 같지만
막 태어난 갓난아기에게는 매우 큰 도전과도 같이 말이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에 과자를 사먹기 위해
설거지를 하며 500원을 용돈으로 받았을 때의 기쁨은 잊기가 힘들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500원이라는 돈은
그 만큼의 기쁨, 만족감과 같은 가치를 얻어낼 수가 없다.
물론 어떠한 사람들은
그게 무슨 성공이냐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이야기는 별로 논할 가치는 없을 것 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비열한 면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러한 말을 할 뿐,
대화를 하고 싶거나 상대를 걱정하거나
조언을 하려고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그러한 척을 할 뿐이다.
그러한 사람들과 의미 있는 대화나 논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아마 다른 사람의 성공 따위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부정하고
그로 부터 만족감을 얻어내고 싶어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논의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번 논의에서 그들에 의견은
일단 저 멀리 구석으로 몰아 넣고
성공과 리스크,
특히 리스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리스크란 무엇일까?
중년에게 최신 스마트폰를 사는데에
리스크 따위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 중 안에서
비교적 연봉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며
사회적 위치도 높기 때문에 그 만큼의 높은 신용도에 의해
어떤 고가의 물건을 손에 넣는 것 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에게는
가까운 미래나 혹은 현재 현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신 스마트폰을 사는 행위는 꽤나 리스크가 있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최악의 경우 평소 먹어왔던 음식의 질을 낮춰서
즉, 끼니를 저렴한 라면으로 때워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금융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리스크를 분산시켜
스마트폰 정도야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특히 이 주제에 대해서는 리스크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 이다.
이 리스크 또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매우 상이하기 때문이다.
통상 사회나 사회 구성원들이
대부분 하지 않는 것들이 아마 리스크가 높을 것 이다.
예컨데,
내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또한
리스크가 굉장히 높을 것 이고
금융 시장에서 수익률이 높을 것이라고 기대되는
모든 상품 또한 리스크가 굉장히 높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언어나 음식 뿐만 아니라 문화까지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해야 하고
특히 언어의 경우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 녹아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로 부딫쳐보지 않는 이상
이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고
이마저도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서는
인식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자국에서의 물적/인적 인프라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쌓아야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굉장히 높다.
자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 조차 리스크가 높은 행위인데
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오죽하겠는가
후자의 경우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실제로 가진 자본을
투입 해야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굉장히 높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사실상 모든 것에 가까우며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과 동일할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자본이 백 만원 이던 천 만원이던
이 것이 모두 날라갈 수 있기 때문에
기대 수익률이 높을 수록
리스크 또한 그 만큼 올라갈 것 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한국에서 리스크가 낮은 행위는 무엇 일까?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간단하다.
모든 사람이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리스크가 낮은 행위이다.
대학을 가거나 자격증을 따려고 하거나
토익 시험을 보려고 한다거나
회사에 취직해 직원으로 일하려고 한다거나
그리고 자국내에 살아가려는 것 또한 리스크가 낮은 행위이다.
모두가 하려는 행동은 그 만큼 리스크가 낮아진다.
안전하지만 그 만큼 이득은 적을 것 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득이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겐 돈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기회가, 누군가에겐 성장이 될 수 있다.
특히 대학 졸업장에 대해
높은 가치를 놓는 한국에서는
이 말에 누군가는
매우 불편한 기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로
격렬하게 반론을 하겠지만
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고
그에 따라 분업화 또한 심화된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의 가치는 그렇게 크지 않으며
과거 한국의 대학 졸업장의 가치가 컷던 이유는
단순히 제대로된 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는 기본적인 경제 이론인 수요와 공급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한데,
수요 보다 공급이 많으면 그 만큼 가치가 하락하며
공급 보다 수요가 많게 되면 그 만큼 가치가 상승하는데
대학 졸업생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대학 졸업생의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며
같은 이유로 자격증이나 토익 시험 마찬가지이다.
처음에야 매우 유니크한 요소이기 때문에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매우 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는 것은 변별력의 소멸하고
그 자리에 '관습'으로서 남아
사회 전체의 리소스를 낭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앞으로도
대학 졸업장에 의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할 것이며
수 많은 사회의 리소스가 여기에 소모될 것 이다.
물론 모두가 그것을 하는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만
'성공'이라는 면을 놓고 보자면
안전하게 하는 것 보다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더욱 확률이 높다.
다만, 관습으로서 남아진
이 것을 하는 것에도 장점이 존재하는데
아무것도 안하는 것 보다는 조금 더 낫다는 것인데
문제는 시간 대비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적다는 것 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은
매우 리스크가 낮은 행위이며
그에 따라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그 만큼 적을 것이다.
역으로 이 반대로 행동한다면
리스크는 높겠지만 그 만큼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대학, 자격증, 토익을 가지지 못 한다면
예컨데 대학을 가지 않는 시간에 취직을 해 실무 경험을 쌓는다거나
자격증과 토익에 시간을 쏟는 것 보다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나 대외 활동으로서 차별화를 노려 볼 수 있다.
물론 그 시간 안에 차별화된 실무 경험을 쌓거나
포트폴리오나 대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하지만,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결과물을 가진 것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
이는 리스크를 받고 이득을 얻어오는
가장 알기 쉬운 예일 것 이다.
물론 이러한 행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면
가장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왜냐하면 모두 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리스크를 감수하려는 사람 조차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를 본 수 많은 구성원들
혹은 미래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참가할 사람들은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각인되기 시작 한다.
이러한 결과는 사회의 리소스 낭비를 더욱더 가속화 시키며
여기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예컨데
자격증이라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발급하는 기관이고
그 밑으로는 이미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 이다.
그리고 이 벽이 견고하면 견고할 수록 이득은 증대된다.
문제는 이 높은 벽의 자격증(혹은 그러한 것들)이
그만한 가치가 없을 때 발생하는데
그러한 것들에 조건에 만족하기 위해
사회의 구성원들의 리소스가 의미 없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대부분의 자격증은 그만한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움직이는 유기체에 가깝고
실제 누군가의 가치를 판단할 정도의 경험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이미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일을 하는 것 보다
본인이 현재 맡고 있는 일이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게 그러한 기관의 구성원들은
누군가를 판단하기에는 경험도 통찰력도 부족한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자격증이나 그에 준하는 것 들은 비지니스에 가깝다는 말이다.
누구를 위한 비지니스일까?
누구의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한 비지니스일까?
적어도 자격증을 소유한 본인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함은 아닐테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이다.
정확히 이러한 것들이
정말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집중하기 보다는
비지니스로 역할로 다루어진다면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의 리소스는 소모되고
동시에 포텐셜 또한 낮아진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본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 필요한 일이 우선시 됨으로
상황이 역전됨으로써 개인 스스로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
그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 만큼 포텐셜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의 논지는 어떠한 사람에게 매우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바로 노력만 한다면
모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러한 사람들 또는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려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은 매우 리스크를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을 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기 때문이며
할 수 없다면 노력이 그 만큼 부족했기 때문이고
노력이 불충분하였기에
그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 이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것은
지수 함수처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본인 스스로가
지금까지 본인의 노력'만'으로 충분한 결과를 냈다면
(정말 그러한지는 믿기 힘들지만)
대게 그것은 스스로의 힘 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서포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남의 노력에 대해 가치를 판단하기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그리고 사회에게도 매우 좋을 것 이다.
때로는 스스로의 힘보다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다.
아니, 아마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다.
인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게 드물고
고도화된 현대는 더더욱
중요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타인에게 의지 해야 하기 때문에
현대인일 수록 더더욱 여기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AI에게 의존하고 있는 시대에
살아갈 초읽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당신이 당연하고 있는 받고 있는
국가로 부터 혹은 사회로 부터 혹은 비지니스로 부터 받고 있는
모든 서비스는 당연하게도
당신이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작게는 사회 안에서
크게는 세계 안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
노력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들에 의해 너무나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노력이라는 가치는
본래의 가치보다 과대 평가 당하고 있으며
본래 높아야만 하는 '신뢰'라는 가치는
매우 과소 평가 당하고 있다.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것이
모래성이 무너지듯이 무너지게 되는데에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성공을 이루고 싶다면
일반적으로 대다수가 이야기하는
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한국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 이다.
여러 의미에서 인간은 똑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공, 그러니깐 얻고 싶은 것이
물질적이던 정신적인던 간에 높은 이득을 얻고 싶다면
리스크를 높일 필요가 있다.
즉,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 것 이다.
나 처럼 모국을 떠나거나
사업을 한다던가 말이다.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어떠한 순간에
이러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며
당연하게도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 될 것이다.
좋은 의미로던 나쁜 의미로던
주위 사람들은 이를 매우 반대하겠지만 말이다.
다만, 리스크 높은 행위를 선택하려고 할 때
스스로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실제로 이 리스크가 터져 눈 앞에 다가왔을 때
매우 치명적으로 다가온다는 것 이다.
때로는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마치 사업이 실패해 모든 자본을 잃어버린 자본가 처럼 말이다.
다만,
이런 리스크가 낮은 행위들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한 사람은 매우 소수 이며
대게 모든 사람들에게 유리한 필드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면
리스크는 낮출 수 있겠지만
그 만큼 사용할 수 있는 리소스는 그 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다.
물론 리스크를 높이려면
유리하지 않은 필드에서 싸워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문제는 위의 경우 내 스스로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리하지 않은 필드에서 싸운다는 것이 문제다.
이 경우 벗어나기 위한 가장 강력한 행위는
판을 깨는 것이겠으나
판을 유지하면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나
이 판 위에서 놀고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강력한 철퇴를 맞을 가능성
즉 너무나도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이 경우 리스크가 큰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매우 적다)
판 자체를 깰 수 없다면
감당 할 수 있을 만큼의 리스크를 높여
그 필드에서 벗어나 자신이 유리한 필드를 찾고
그 곳에서 싸우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
그리고 이 판단은
행동 여부에 따라 어떤 형식으로든
높은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 모두 대학에 가야 하며
회사에 가기 위해 토익이나 자격증을 따야하고
회사에 들어가서 성실히 일하며
좋은 결혼 상대를 만나 결혼해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그러한 사회의 통념 말이다.
물론 이 중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으나
이 중 일부는 본래 가져야만 할 가치보다
너무나도 과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평가는 기만을 낳고
기만은 본질을 흐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의 통념 대로 따라가려고 하면
반대로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 이다.
하지만 그 길은 매우 비좁고
길 바깥 쪽은 절벽이기에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길로 갈 수 있을지 언정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는 흔히 스스로 어른이라 부르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에 이야기이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같은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잘 정비된 길을 가는 것 처럼 말이다.
아마 대게 사람들은 스스로가
절벽에 떨어질지 떨어지지 않을지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 이다.
이 경우 어떤 행동이 가장 합리적일까?
스스로 어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말하는데로
잘 정비되어진 길로 보이지만 너무 비좁아보이는 길로 가야할까?
아니면 좁아보이지는 않지만
가는 길 곳곳에 가시덤불이 보이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험난해보이는 길로 가야 할까?
나라면 후자를 선택하겠다.
험난해보이지만 가시덤불 정도야 상처를 조금 입을 뿐
회복 가능하기 때문에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보다 나아 보이며
그 길 구석구석을 잘 돌아다니다보면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보물 상자가 있을지는 또 누가 알겠는가?
그 중간에 예기치 못한 만남은 무엇보다
끈끈한 인연을 만들어 줄 지는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또한 그 과정 속에서 경험들과 극복한 시련들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해주고
그러한 것들을 통해 개성을 얻게 될 것인데
이러한 가능성을 이러한 포텐셜을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단 한번 뿐이며 사라진 시간
즉, 사라진 포텐셜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나의 논지에
'대단한 성공을 이루지도 못한 너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고
이야기 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나에게 말로는 '자격'을 요구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나의 주장이 마음에 안들거나
내 주장이 자신이 믿고 있는 어떠한 것에 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 이다.
하지만, 애초에 인류는 자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내부에서 대표자로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정말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선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에 선택에 의해 자격을 잠시 빌려 온 것일 뿐이다.
또한 정말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한들
그러한 자격을 부여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먼저 일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에 대한 이야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이다.
정작 그러한 말을 나에게 하는 사람 또한
어떠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반론을 제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의견을 말하는데에 있어서 어떠한 자격이 필요하다면
자격이 있으냐고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자격이 있기에
나에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안이던 논의에 있어서 자격은 필요치 않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보면
그 누구도 의견을 주장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아마 그들이 야이기하는 '자격'을 얻어내었다고 한들
그들은 또 다른 자격을 찾아내
나에게 요구할 것이 틀림 없으니
그들의 요구에 들어줄 이유는 전혀 없을 것 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말 자격이 있으냐 없느냐가 아닌
상대방의 의견이나 말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입을 막으려 하는 것 이다.
이는 밀이 이야기한 것 처럼
서로의 자격을 논하는 것은 진리로 다가갈 기회를 놓칠 뿐이다.
서로 의견이 정말로 안 맞는다면
서로의 자격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에 대해 리스펙트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우리의 길이 다르다고 할 지라도
향하고 있는 목표가 동일하다면
어느 지점은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고
그 때야 비로소 다시 한번 의미 있는 논의를 하면 그만 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냥 나의 이야기가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아 심술이 났을 뿐,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기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성공을 이루고 싶다면
스스로 어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거나 고려해보는 것은
우선 순위에서 멀리 떨어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스스로 성공에 대해 정의를 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그 만큼 리스크를 높여야하며
이 리스크가 실제로 나에게 나타났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지 없는지를 판단하여
리스크를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 이다.
물고기는 스스로 낚아야만
그 본래의 가치를 얻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