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랫만에 생각 카테고리로 글을 작성하는 것 같다.
그 동안은 글을 작성한다면
에세이를 중점으로 작성했으니 말이다.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은 분명 즐겁지만,
어느 정도 형식이 있고 그 만큼 무겁기 때문에
작성하는데 시간이 꽤 나 걸린다.
무엇보다 이전과 다르게
이러한 글을 작성하는 것보다
일에 대한 중요도와 우선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이 크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작성하고 있는 에세이들은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해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어쨋든 이번에는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만약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나에게 그 창 중 하나가 바로 리스크 이다.
내가 하는 행동들의 대부분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왜냐하면 나는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보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리스크가 클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외국에 살아가는 것 또한
사실은 무척이나 리스크가 큰 행위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리스크가 현실로 다가온 경우는 많다.
세상을 리스크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가장 큰 이점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가 된다는 것 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황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이점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가장 크게 무너질 때는 예측하지 못할 때 아니겠는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은
언제나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상황에 대해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리스크 관점에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대비하거나 생각 해본다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
예컨데 법에 대해 이를 생각해보자.
복잡한 법까지 갈 것 없이
일상 생활에서의 예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예컨데, 차도를 건너서 카페에 가기 위해서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카페의 투명한 창으로 안쪽을 살짝 보니
빨리 간다면 자리에 앉아서 편안하게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횡단보도는 그리 길지 않아서 빠르게 뛴다면 쉽게 건널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밖은 너무 덥기 때문에 땀에 흠뻑 젖어
나는 빨리 건물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신호는 빨간 불이다.
이 상황에서 몇 가지 선택을 해볼 수 있다.
위험하지만 차도를 그대로 건너서 카페 안에 빠르게 들어가
시원한 자리에서 편안한 한 때를 즐길 것인가
안전하게 건널 것인가 말이다.
리스크를 받아들인다면
땀을 더 이상 흘리지 않아도 되고,
자리에 앉기 위해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이를 위해서 받아들여야하는 것은
어쩌면 받을지도 모르는 벌금,
차에 치일 수 있는 가능성 등의 리스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리스크를 받아 들일 수 있는 만큼
편안한 시간은 가치가 클까?
가치가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횡단 보도의 거리에 따라 다르겠지만
빨간불임에도 건너볼 시도를 하지 않을까?
물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관에 갇혀 있다면
물어볼 것도 없이 법을 어기는 것은 악일 것 이다.
(그 사람이 정말로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인 사람인지는 둘째로 치자)
또한 내가 좋아하는 유쾌한 나의 친구의 말 처럼
정말로 5분 빠르게 가려다가 50년 빨리 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스크 관점에서 바라보는 법은
행동에 대해 선인가 악인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가 아닌
리스크를 얼마나 받아들일 것인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보편타당한 윤리적인 상황들을 제외했을 때
(물론 이런 보편타당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지만
넘어 가기로 하자)
리스크를 받아 들일 수 있다면 그 행동은 정당하다.
만약 이러한 수 많은 리스크를 받아들이고
정말로 빨간불 상태에서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인다면
그 사람은 암묵적으로 스스로의 리스크를 인지 하고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누구도 탓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도로에서 과속을 하고 있었는데,
순찰하던 경찰의 단속에 걸려 벌금을 부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매우 억울 했다.
왜냐하면 당장 바로 앞의 차도 자신 만큼이나 과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를 놀리는 듯이
속도 위반을 하는 자동차를 보며,
그는 억울 하다고 호소 할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그의 호소는 정당성이 떨어 진다.
그가 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가 나쁘고,
그가 악이라서가 아니라
그는 스스로 리스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가 억울하다는 말에 대해 정당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면허증이라는 증명서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렇다는 것은 그는 최소한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모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암묵적으로 수 많은 리스크에 동의를 했고
벌금을 부여 받던, 법적 처벌을 받던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좀 더 극단적인 예를 살펴보자.
때로는 어머니인 여성이 자기 자식을 살해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우리 모두는
사람을 그것도 자기 자식을 죽였기 때문에
악이라는 판단을 손 쉽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자식이 매우 희귀한 병을 가지고 있음을 판명났으며
어머니 또한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져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경우 악인가 선인가를 확실히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태아에게 유전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부모가 낙태를 바란다면
이 경우 악인가 선인가를 확실 히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정당성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선과 악이라는 관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 선과 악이라는 관점의 큰 한계는
매우 주관적인 의견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며,
과거에는 이러한 판단을 교회가 대신 했지만
현재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교가 세계의 패러다임인 시절과는 크게 다르게
현대인들은 신과 멀어졌고
그로서 인간은 신의 대리인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가
그리고 그 것을 누가 판단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판단을 하는 사람의 자격은 충분한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없다면
선과 악이라는 관점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 선과 악의 관점에서
제 2차 세계가 일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언제나 선과 악이라는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이라는 관점은
적어도 현대와 맞지 않으며
세계를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된다.
그럼 조금 분위기를 바꿔서 이러한 리스크를 가지고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실제 나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나는 출근할때 사용하는 가방에는
언제나 조그만한 우산을 넣고 다닌다.
왜냐하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언제든지 비가 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올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한 대비
즉, 방향성을 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가방의 무게가 무거워 진다.
나는 어딜 가던 노트북을 들고 다니기에
무게가 무거워지는것은 항상 피해야만 했다.
그래서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에 대해
내가 가장 많은 고민을 했다.
또한 가방에 넣을 수 있는
적절한 무게와 길이 그리고
만약 잃어버리거나 버린다 하더라도 문제 없는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가격을 가진 우산을 찾아야 한다.
결정적으로 항상 가방에 있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패턴화 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꽤 나 많은 고민을 해서 리스크에 대한 방향성을 정했는데
필요한 날 우산이 안에 없어서
비에 흠뻑 젖어거나,
근처 상점에서 평소보다 비싼 가격을 주고
우산을 사게된다면
이보다 최악의 상황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한 것 보다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점은 무엇이 있을까?
먼저 가장 큰 것은 흠뻑 젖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세탁 문제 등과 같은 받을 수 있는
흠뻑 젖으면서 나타나는 모든 스트레스를 차단할 수 있다.
이에 더해서 매번 비 올때 마다 사야하는
우산에 대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패턴화 한 이후에는
여기에서 오는 모든 것들을 차단할 수 있게 되는 것 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신용카드나 교통 카드를 2개 씩 만들어두고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나는 항상 삶 속에서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의미로 삶에 관점으로 넘어가 보자.
물론 위에서 일상 생활에서
리스크를 다루는 것과는 접근 방식이 많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상 생활은 대게 나의 바운더리 안에 있지만,
삶은 나 뿐만 아니라 타인의 바운더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운더리가 겹치면서
리스크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증가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패턴화 할 수 가 없으며,
수 많은 크고 작은 리스크가 합쳐져서 리스크가 가산되어진다.
수학과 다르게
삶과 삶이 겹치게 되면 부분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튕겨져 나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수 많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항상 오는데
(사회가 더욱 발전하고 분업이 고도화되면 선택의 폭은 계속 넓어 질 것이다.)
리스크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선택의 연속인 삶이 좀 더 수월해 진다.
왜냐하면 각 선택에 대해 나타날 수 있는 리스크를 생각해보고
스스로가 어디 까지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다소 선택하기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최악의 리스크가 현실로 다가 왔을 때,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를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어느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된다.
내가 이방인의 삶을 선택해야할 때를 예로 들어보자면,
이방인의 삶을 선택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리스크는 무엇이 있을까?
최악의 경우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일 것이다.
많은 고민과 그리고 적당한 준비를 하고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거기에 들어간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리스크라 할 수 있다.
그 밑으로 낮선 환경에서 나타날 수 있는 리스크
즉, 병에 걸린다던가, 적응을 하지 못한다던가의 환경적인 리스크,
이때까지 내가 구축했던 모든 인프라
즉, 자주가는 가게, 카페 등의 행동 패턴을 포함해
가족, 친구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제로 베이스부터
다시 구축해야 할 때 나타나는 리스크들
그리고 그 밑으로 프리즘 처럼 뻗어나가는
수 많은 작은 리스크들이 존재할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한국에서 있을 때 보다 리스크가 배는 증가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 일까?
가장 크게는 포텐셜을 얻을 수 있다.
환경 변화 시킴으로써 고질적인 습관 같은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새로운 언어, 새로운 환경에 대한 경험,
그 속에서 수 많은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의 자세를 배울 수 있으며,
특히 가장 중요한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과의 교류는
내가 인식하지도 못한 방향을 깨닫게 해줌으로서
모든 문제에 대해 솔루션으로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삶에 새로운 포텐셜을 더 할 수 있다.
즉, 이방인의 삶을 선택 한다면
크게 봤을때 배의 리스크를 받고,
그 만큼 포텐셜을 얻어 올 수 있게 된다고 나는 판단했다.
하지만, 그 만큼 배로 증가한 리스크는
후에 감당하지 못 할 정도의 위기가 다가오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그렇기에 리스크 관점에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은
밀의 개념을 조금 빌려오자면
진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부분적 진리에 가깝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내가 이방인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에 나는 없었을 것 이다.
이처럼 리스크를 받아들이면 들일 수록
삶의 포텐셜은 증가할 수 밖에 없고,
리스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못 할 수록
삶의 포텐셜은 증가하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소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포텐셜은 어찌보면 엔트로피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는 있지만
채울 수 있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 한다.
또한 포텐셜을 터트려야할 시기에
리스크라는 장작을 넣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최대로 부풀어오른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것 처럼
가능성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고 말 것이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 리스크를 받아 들일 수 있은지는
사람 마다 그리고 시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다.
이런 리스크 관점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창문은 내 삶에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이
렌치나 여러가지 드라이버와 같은 도구들을 손에 넣은것 처럼
나 또한 상황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판단 도구가 또 하나를 손에 넣은 것이다.
특히 개인 주의 관점이 주류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만약 과거와 같이 주류가 공동체 주의 였다면,
이러한 리스크가 실제로 다가왔을 때
보호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다소 리스크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있다.
공동체가 이러한 리스크가 다가왔을 때
보호해주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큼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줄어 들겠지만 말이다.
지금도 리스크를 줄이고 싶다면
소규모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개인 주의가 주류가 된 현대에서는
그러한 리스크를 모두 개인이 받아야 하기 때문에
과거보다 더욱 신경 쓸 필요가 있다.
개인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기술과 문명의 발달이
더욱더 가속화 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말이다.
가속화 되면 될 수록 고도화 되고
깊이가 깊어질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중요한 것들을
점점 타인의 손에 맡겨야만 할 것이다.
현재는 법이나 의료 부분 까지지만,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는
식단, 운동을 포함한 생활 패턴까지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 아닌
타인(혹은 기계)에 맡겨야 할 지도 모른다.
다른 종류의 리스크가 축적되는 것 이다.
그럴 경우 신뢰 있는 사람(기계)는
어디서 구할지는 둘째치더라도
축적된 리스크 때문에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이
더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한 개인의 손에서 떠나버린 이상
해소할 수 없는 엔트로피 처럼
줄일 수 없는 리스크가 각 개인들의 손에 떠넘겨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들은 리스크를 끔찍하게 싫어해
타인이 리스크를 감수하려 행위를 본다면
걱정이라는 명분으로 못하게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듯이
사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대게 일말의 걱정이나 관심도 없으면서
상대를 기만하려고 한다.
물론 리스크를 낮추는 행동 자체가
어리석은 행동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리스크를 낮추는 것은
대개 현명한 선택일 것 이다.
위에 이야기한 내용과 같이
나 또한 삶 속에서 리스크를 낮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삶 속에서 리스크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내가 그러한 시도를 했던 이유는
그 속에 명확한 패턴이 존재 했기 때문이고,
너무 나도 명쾌했기 때문이다.
미래나 혁신 그리고
각 개인의 꿈과 같은 부류의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은
명확히 패턴화 할 수 없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에
어떤 환경인지 명확히 할 수 없고
혁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 해야하기 때문이다.
어떤 패턴을 가질 수는 있으나
명확하고 명쾌한 패턴이 아닌 요소들만을
슬며시 엿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요소들 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삶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웃기게도
스스로가 삶의 통찰이 있다고 있다는 사람들이
너무 나도 자주 보인다.
물론 그러한 시도야 좋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을 통해 하려 한다면 이보다 비열한 것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삶 자체를 패턴화 하려는 시도는
미래를 예지하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적어도 삶에 있어서 리스크를 낮추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다.
리스크는 스스로 짊어졌을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타인이 강제로 쥐어준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다.
인생을 바람가는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인간은 날개가 없다.
즉,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성공 길이
모두가 걷고 있는 길을 가야만 한다며
리스크를 낮춰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
왜냐하면,
모두가 지나가는 그 길의 폭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매우 비좁을 수 밖에 없으며
최악의 경우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로열로드 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이기에
대개 지옥과 다름 없다.
오히려 리스크를 높여야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 할 수 있다.
그 앞에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마치 가시덤불이 내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러한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꿈이던,
행복이던 돈이던 자아 실현이던 간에 간에 마찬가지다.
이는 모두 리스크를 높이는 행위이다.
반대로 위에서 언급한대로
리스크를 낮춘다면
매우 잘 정돈된 로열로드와도 같은 길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한정되어 있으며 매우 좁기 때문에
멋드러진 스포츠 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기의 성능을 마음 껏 발휘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 한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던 가시덤불 골짜기건 간에
걷다보면 이에 따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이에 따른 대비책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때로는 멋진 동료를 만나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러한 리스크 들이 현실로 다가와
앞이 보이지 않아 넘어져 다치거나
수 많은 상처에 의해 병들어 죽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논지에 동의할 수 있다면
복잡해 보이는 선택권 들을 규합할 수 있고
이제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리스크를 낮출 것 인가,
아니면 리스크를 높일 것인가
선택은 각 개인의 몫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는가?
공짜 점심은 없다고 말이다.
공짜 점심을 먹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를 스스로 짊어지는 수 밖에 없다.
결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누구나 몇 개 씩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사람마다 유사한 점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안의 디테일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세상을 바라볼 때
나는 때때로 리스크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리스크를 높이면 높일 수록
그 속에서 포텐셜을 높임으로서
좀 더 높은 보상과 기회를 손에 넣을 수 있고
리스크를 낮추면 낮출 수록
상대적으로 낮은 보상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이다.
나는 기회가 보일 때,
이러한 리스크를 먼저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높은 보상을 바란다면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리스크를 한계까지 높이는게 가장 중요하다.
가장 보편적으로
리스크를 높일 수 있는 것은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왜 인간은 먼 과거에도
그리고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도
모험의 이야기를 듣고는 할 때
흥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어떠한 형태던간에
모험에서 얻을 수 있는 값비싼 보물을
얻을 수 있는 기대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이야기 끝에서
보물을 손에 넣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크나큰 쾌감을 얻고는 한다.
결국 내 손에 넣을 수 없는
보물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하는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물론 흔히 이야기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여행을 떠나는 영웅들을 배웅하지만
현실속에서 이런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비아냥거리거나 걱정이라는 명분으로
너가 할 수 있을리가 없다는 듯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겠지만 말이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사람은 원래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주변 사람도, 친구도 심지어 가족까지도
24시간 당신의 행동과 생각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원대한 꿈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일 수록
대게 타인이 성공을 이루게 된다면
누구 보다 앞서서
'난 너가 성공할 줄 알았다'며 엄지를 치켜들 것 이다.
만약 누군가가
마지 못해 이해해주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당신의 꿈을 이유 없이 지지해준다면
천운을 타고 난 것과 같다.
인생에서 그런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들 것 이다.
어쨋든 이러한 리스크 관점은
그것이 중요하건 중요치 않건 간에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하나의 판단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을 할 때
우리는 타인에게 되묻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불굴의 용기가 있는지 말이다.
물론 그러한 불굴의 용기가 없다하더라도
선택 자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리스크가 터지는 순간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회복하는데에는 수년,
어쩌면 수 십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한 과정이 또 하나의 어떠한
기회가 될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그와 동시에 어떠한 것을 잃어야만 하기 때문에
썩 내키지 않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