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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 Technology ] 바이브 코딩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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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가히 AI 시대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IT 업계에서 대다수의 작업량을 차지하는 프로그래밍의 영역에서 생성 AI를 이용한 생산성 향상의 가능성이 보이면서 어느 분야보다 가장 빠르게 괄목적인 성과를 이루고 있는듯 하다. 고작 몇 년전에는 커서에 의해 프로그래밍을 AI에게 프로그래밍을 위임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 어느정도 증명되면서, 작년에는 Claude Code의 영향으로 인해 이러한 이슈가 좀 더 가속화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굉장히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생성형 AI 솔루션의 발달은 개발자의 종말론을 더더욱 부각시키면서 업계 전반이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변화 속에서 “프로그래밍을 몰라도 생성형 AI만 있으면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힘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Saas 솔루션은 종말할 것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도 들리는 것으로 보면 소프트웨어 업계가 큰 격변의 시기가 온것임에는 틀림 없어 보인다. 허(虛):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환상 이런 상황에서 가장 주목받는 주장들은 서론에서 언급했다시피 ‘프로그래밍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성형AI를 이용하면 빠르게 제품을 개발이 가능하다’라는 주장이고, 실제로 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정말로 움직이는 결과물을 단 몇초 만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빠르게 제품 개발 가능하다’는 주장의 가장 큰 맹점이 있는데 개발자의 존재 이유가 단순한 제품이나 기능개발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AI를 통해 그럴듯 한 솔루션을 만들었다고 치자. 이것에 얼마만큼의 비지니스성과 지속가능성이 있을까? 예컨대 AI에게 넷플릭스나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같은 페이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면, 아마 실제로 그럴듯 하게 만들어 줄 것 이다. 이러한 인기 서비스들은 토이 프로젝트로 다루기 쉽고,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아 관련 자료를 찾기도 어렵지 않다. 코드 또한 깃허브에 충분...

[ Essay - Intuition, 생각 ] 리스크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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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랫만에 생각 카테고리로 글을 작성하는 것 같다. 그 동안은 글을 작성한다면  에세이를 중점으로 작성했으니 말이다.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은 분명 즐겁지만,  어느 정도 형식이 있고 그 만큼 무겁기 때문에  작성하는데 시간이 꽤 나 걸린다. 무엇보다 이전과 다르게  이러한 글을 작성하는 것보다 일에 대한 중요도와 우선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이 크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작성하고 있는 에세이들은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해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어쨋든 이번에는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만약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나에게 그 창 중 하나가 바로 리스크 이다. 내가 하는 행동들의 대부분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왜냐하면 나는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보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리스크가 클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외국에 살아가는 것 또한  사실은 무척이나 리스크가 큰 행위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리스크가 현실로 다가온 경우는 많다. 세상을 리스크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가장 큰 이점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가 된다는 것 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황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이점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가장 크게 무너질 때는 예측하지 못할 때 아니겠는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은  언제나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상황에 대해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리스크 관점에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대비하거나 생각 해본다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 리스크 관점에서: 법에 대해 예컨데 법에 대해 이를 생각해보자.  복잡한 법까지 갈 것 없이  일상 생활에서의 예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예컨데, 차...

[ 생각 ] 존중과 존경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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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에 어른들은  나에게 존중과 존경을 원했다. 그런 존중과 존경의 의미로 존댓말과 자신들에 요구에 절대적인 긍정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시점에 이런 어른들의 요구에 정확히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위화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위화감을 내 나름대로 표현했지만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대개 내가 어른이 된다면 이해할 수 있다며  다시는 언급하기를 꺼려했고 불편해 했다. 다시금 언급한다면 가정 교육부터 시작해 심하면 그렇게 불만이면  한국을 떠나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나의 입을 사실상 봉쇄한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런 경험에 어떠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는 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뿐이라며 손사래를 치겠지만 약 28년 동안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많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같은 말만 반복해서 들었을 뿐이다. 여기서 그 어른이란  한국에 흔히 있는 나이로 나눈 어른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나는 지금 이 시점에도 여전히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나의 그들에 대한 위화감이 맞았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떠한 의도와 목적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인식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사실  존중과 존경을 원하기는 커녕 단순히 복종을 원한 것이다.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체면이 있기 때문에  본질을 흐려 바꿔 말한 것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과  자신이 '어른'이라는 위치  즉, 체면을 위해 구태여 거짓말을 한 것이고 바꿔 말해서 나에게 존중과 존경을 구걸한 것 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에 대해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게 어른이 된다면 이라는 조건을 달아 자신이 불리할 수 있는 자신의 신뢰성이 잃을 수 있는  논의 자체를 틀어막은 것 이다. 나는 애석하게도 이러한 말에 속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비겁하고 비열한 어른들은 그걸 진짜로 믿었냐며 어깨를 으쓱...